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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여행]자연의 걸작~ 구담봉을 지나 옥순봉에 다다르다.

푸른희망(이재현) 2011. 5. 25. 14:17

오늘은 지난 단양 여행의 백미  유람선 관광을 통한  "옥순봉" "구담봉" " 제비봉" 등의 걸출한 자연 예술작품을 보시겠습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자신도  다시금 설레는  여행지 입니다.   수몰되기 전에는 얼마나 더 멋진 풍경이었을까 하고 아쉬움을 토로도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혜로워지고자 물을 찿고, 어진 이 되고자 산을 찾았더니

남한강 물길 따라 크고 작은 명산 품은 단양에 이르더라.

 

누군가 일필휘지로 내려쓴 듯 힘차게 뻗어내린 소백산맥을 따라

선이 굵은 능선들이 밑그림을 이루어 내고 철마다 하늘이 빚어내는 빛깔로

채색을 더하니 어느새 단양의 곳곳에는 그림 같은 비경이 가득하구나

 

지혜롭고 어진 이가 되고자 단양의 명산을 찾았는데...

그저 그 아름다운 풍경속에 일부가 되어 갈 뿐...

 

대한민국 녹색쉼표  단양 안내책자에서~

 

옥순봉을 옆으로 스치듯이 지나가는 유람선이 아름답습니다.

희고 푸른 빛을 띤 바위들이 힘차게 솟아 마치 대나무 싹과 같이 보인다는데서 유래한 옥순봉은 원래 청풍에 속해 잇는 경승지 였다고 합니다. 조선 명종때 관기였던 두향은 그 절경에 반해 당시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에게 옥순봉을 단양에 속하게 해달라는 청을 넣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청풍 부사의 거절로 일이 성사되지 않자  이황 선생은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글을 새겨  단양의 관문으로 정했다는 사연이 전해집니다.

 

훗날 청풍부사가 그 글씨를 보고 감탄하여 단양군에 옥순봉을 내어 주었다는 뒷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과연 주인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보는 이은 그저 오랫동안 잊지 않도록 두 눈과 가슴에  그 모습을 감명깊게 새길 뿐...

 

장회 나루의 선착장으로 모두들 발걸음을 옮깁니다.

 

저기 우리 일행이 탑승할 유람선이 힘차게  고동을 울리며  진입을 하고 있습니다.

뒤에 보이는 아름다운 석벽이  바로 " 구담봉" 입니다.  

전체가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감탄사가 끊이질 않습니다.

 

구름 한점없이  옥빛 바닷물 같은 하늘이 정~~말  아름답지요.

불어 오는 봄바람에  나뭇잎들의 속살이 하얗게 온 산을 뒤덮고 있는 멋진 풍광 이네요~~

 

이곳이 바로  제비봉 입니다.

제비봉은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설마동 계곡을 끼고 있어 가을 산행을 사랑하는 등반객들에게  보배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날개를 활짝 펼친듯한 형상의 제비봉, 날아 오르려는 듯한 기세의 풍경이 정말 멋드러 지는군요~~ 충주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끼고  기암 괴석의 절묘한 조화와 함께 이어지는데  산 정상 까지는  신갈나무와 굴참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제비봉의 날개에 살포시 올라  아름다운 단양팔경을 둘러 보고 싶어 지는 군요!

 

 

 

유람선의 우측편으로 보이는 기암 괴석들의 절경에서 눈을 뗄수가 없군요~~

 

두향의 묘소가 보입니다. 퇴계 이황을 사랑했던 기생의 묘 입니다.

수몰되면서  지금의 높은 지역으로 이장을 했다고 하네요~~

 

[내용출처~ 다음검색]

본시 기녀(妓女)가 아니었으나 5살 때 아버지를 사별하고 어머니 또한 10살 때 사별하여 퇴기(退妓)인 수양모 아래서 자랐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退溪가 거문고에 대한 상식도 해박하고 거문고 듣기를 즐겨했는데 그 때 13세의 나이로 杜香이 거문고 타기에 能해 발탁되었는데 이것이 退溪 李滉을 모시게 된 인연이 되었다. 杜香은 退溪 모시기를 마음에서 진실로 다하여 以心傳心으로 時를 나누고 거문고를 타 이황의 업무로 인한 고단함을 풀어주었는가 하면 古梅인 紅梅와 白梅를 가져다 心身을 달래주었다 한다. 정비석 선생의 저서 명기열전에 의하면 두향이 단양팔경을 지정하기 위하여 퇴계 이황 선생께 청풍군수 이지번 선생을 만나도록 간청하여 옥순봉을 양보받도록 허락받아 오늘의 단양팔경을 명명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두향과 이황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내용출처~오픈백과]

 

듣자하니 단양의 제 15대 군수로 퇴계 이황이 부임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두향은 퇴계라는 신임 군수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여 수소문하여 보았다. 일찍이 퇴계는 조정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뜰에 핀 매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은 적이 있었다.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 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두향은 퇴계가 매화를 두고 읊은 시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꼼꼼이 살펴보았다. 매화를 두고 읊은 시이기는 하나 나라의 어지러움을 개탄하는 우국지정이 어린 시임을 느꼈다. 비록 조정의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나, 바다같이 넓은 세상일이 좁은 연못 속에 뒤 엉겨 있는 듯, 어지럽고 산란함을 매화나무에 빗대어 읊은 시가 두고두고 음미할 만 하였다. 두향은 어느 사이 퇴계의 매화 시를 외우고 있었다.


퇴계 이황은 48세 되던 무신 년 정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그 실은 청송 군수로 외직에 나가기를 원했으나, 단양군수의 직분을 제수 받게 되였다.

관기로서 두향은 신임 군수 퇴계 이황을 가까이 모시게 되였다. 두향은 사별하던 어미로부터 물려받아 그동안 애지중지 기르던 분매를 퇴계의 처소에 옮겨 놓았다. 때마침 퇴계가 단양으로 부임하던 시기는 이른봄이라 화분 속의 매화도 곱게 피어 은은한 향기를 내 뿜고 있었다. 처소에 든 퇴계는 환하게 피어난 매화를 보고 반기는 듯 하였으나, 이내 곧 매화 분을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 줄 것을 명하였다.



두향은 매화분에 관한 자초지종을 아뢰고, 6년 전의 퇴계가 읊은 매화 시를 외우면서, 매화는 고상하고 아담하여 속기(俗氣)가 없고, 추운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고, 격조가 높으며, 운치가 남다르며, 뼈대는 말랐지만 정신이 맑고, 찬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면서도, 곧은 마음을 고치지 않기 때문에 이 매화꽃과 함께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단양 고을을 잘 다스려 줄 것을 아뢰었다.



퇴계가 두향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해보니, 두향의 속마음이 진실 된 듯 한데, 고을 백성을 다스리려 내려온 스스로가 백성으로부터 재물이나, 금전을 뇌물로 받는 것은 자기 스스로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 한 그루 처소에 가져온 것을 참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두향은 매화 한 그루를 또 구했는데 그 꽃 빛이 희다 못해 푸른빛이 나는 진귀한 매화였다. 그 청매를 퇴계에게 드리니 "나무야 못 받을 것 없지." 하고 그 나무를 아전으로 하여금 동헌 앞에 심도록 하고 즐겼다.



이 때에 퇴계는 첫 부인과 재취부인마저 사별하고, 아들도 이미 한 명이 유명을 달리한 때라, 인생의 깊은 고뇌와 함께 심신은 많이 쇠약하여 있었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시화(詩話)와 음률을 논하고, 산수를 거닐며 인생을 즐기기도 하였다.


퇴계는 단양에 부임하면서 가뭄에 농작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어렵게 복도소(復道沼) 저수지를 막는 데에 힘썼다. 복도소가 완공되자 퇴계는 근처의 바위에 복도별업(復道別業)이라는 네 글자를 새기도록 하였다. 이 바위는 충북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이 저수지는 오늘의 단양읍 하방리 단양 천 변에 뚜렸한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단양의 경치 좋은 내용을 한가지 어휘로 묶어 부를 것을 생각하였다. 그것이 오늘날에 불려오는 "단양팔경"이다. 단양 팔경이란 도담삼봉, 석문,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구담봉, 옥순봉 등이다. 퇴계는 이 경치 좋은 여덟 곳을 단양팔경으로 명명하려 하였으나, 두향이 그 내용을 듣고 보니, 그 중에 옥순봉은 그 당시 단양 땅이 아니라 청풍 땅이었다. 두향이 출생한 곳이 바로 옥순봉 근처라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내용은 잘 알고 있었다. 가까이 모시고 있는 퇴계가 하고자 하는 일에 두향은 기지를 발휘하였다.



퇴계에게 옥순봉의 관할 소속을 아뢰면서, 퇴계로 하여금 청풍 군수를 찾아가 타협을 보면 해결이 잘 될 것이라 하였다. 당시의 청풍 군수는 후일에 영의정이 된 아계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 이였다. 퇴계는 두향의 말에 따라 청풍 군수 이지번을 찾아가 상의한 결과 옥순봉이 청풍군 관할에서 단양군 관할로 바뀌게 되었다. 그 길로 퇴계는 옥순봉 아래에 단구동문(丹邱洞門)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이니, 단양의 석공들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깊게 새기니 오늘까지 그 암각 문이 전해온다. 이렇게 되어 두향의 기지로 단양팔경의 명명이 완성을 보게 되었다.


퇴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한지 10개월만에 단양 땅을 떠나야만 할 일이 생겼다. 그 해 10월에 퇴계의 친형인 대헌공이 직속상관인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형과 아우가 직속상하관계로 있으면 나라 일에 공평을 기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세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게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퇴계는 그 날로 사표를 제출했다, 청렴 결백한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의 성품을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그를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되어 퇴계와 두향은 애달픈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때 퇴계는 풍기 군수로 옮겨가면서 두향 으로부터 받은 청매 한 그루도 함께 가져가서 도산에 심었다.



한편 퇴계가 떠난 후 두향은 부유함과 호사스러움을 앞 새우는 시중잡배들과 어울리는 것이 단 10개월 동안이나마 모시던 그 어른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고 아예 기적에서 물러 날 것을 결심하고 새로 부임한 사또에게 그 사연을 말하고 허락을 요청하였다. 신임 사또의 허락을 받아 기적에서 면천되어 물러난 두향은 오로지 퇴계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아갔다.



두향의 마음이야 오매불망 퇴계를 잊을 수 없었으며,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으나, 퇴계의 처지를 생각하면 참아 그렇지를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간접적으로 인편을 보내 문안을 여쭙곤 하였다.



헤어진지 어언 4년이 되는 봄날에 문안 여쭈러 보낸 인편에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두향에게 보내주었다.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 -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 -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햑요금탄절현) -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퇴계는 이 시문 끝에 壬子 正月 二日 立春이라 쓴 것으로 보아 그의 나이 52세(1552)되는 해의 작품이다. 이 시문의 끝 구절에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는 분명히 두향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두향은 이 시 한편을 받고 평생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노래로 불렀다.



그 후 20 여 년이 흘렀다. 1570년 어느 겨울날 퇴계는 방안의 매분을 가리키며 "매형(梅兄)에게 물 잘 주라"는 말을 남기고 임종하였다. 퇴계의 임종 소식을 들은 두향은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진하였다.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가 강선대 아래에 묻어달라 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무덤과 묘비는 지금도 충주 뎀 물 건너 강선대 근처에 있다.

 

 

 

 

금수산 자락의 현학봉 ~ 마치 한마리의 학이 날아 오르는 형상을 했다 하는 선장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아~~옥순봉,  정말 아름답습니다.

절경을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네요

물과 바위, 그리고 나무와 숲~~ 아주 절묘한 자연의 예술 걸작품 입니다.

 

 

구담봉의 정상 바위를 클로즈 업 해보았어요~~ 아주 작은 거북이 한마리가  산으로 오르는 형상이 확실합니다~~와  !

 

 

 

 

유람선 내내 벌어진 입을 닫을 수가 없었던  풍경 입니다.

자연이 만들어 낸  절묘함에 감탄이 절로 절로 터져 나옴은  그 어떤 인간의 예술작품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형형색색 물드는 가을에 오면 더 멋진 풍경이 기다릴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