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희망(이재현) 2010. 9. 30. 10:40


우리 가족의 처음 이사


 지금 44이라는 나이가 들었지만 생모의 얼굴이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아마도 길에서 마주쳐도 모를 것입니다.  머리 속을 쥐어 짜도 윤곽도 어른 거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어릴 적 동생들과 내 곁에 계셨던 적이 있으며 항상 바보 같은 엄마가 밉고 싫었다는 기억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분명 제게도 어머니는 존재했던 사람이었음이 확실합니다.

 

 나와 내 여동생 을 낳고 독립해 보겟다고 하시며 시골에서 조금 떨어진 제천군 금성면 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었다고 합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산 중턱쯤 되는 곳에 기와집이 있었으며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방, 큰 방, 작은 방, 등등이

고래등 같았던 집으로 기억합니다.  적어도 1학년이 되기 전의 어린이에게는 말이죠

아마 그 때 그 주인양반을  양네네 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집 할아버지의 아들이 성씨는 모르고 양래 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는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는데,  그 단칸 방에는 튓 마루도 있었고,

방안에는 한약을 담아 놓은 약 상자들이( 지금 한의원에서 볼 수 있는 것) 규격화된 크기로 가지런히 놓여 있던 것으로 압니다.

한문을 배우셨던 아버지가  이미 한문에는 안목이 계셨고,당신의 소아마비로 인해 고통 받았던

유년시절에 대한 아픔과 분노 그리고 병자에 대한 치료박애 정신이  골고루 얽혀 한의학 기술을 익히셨던 것이죠. 


 특히 아버지께서는  임신하지 못하는 아주머니들에 대한 효엄이 있다고 동네 자자하게 소문이 무성했지요. 

아버지도 그것이 천직인양  정말로 열심히 사셨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 한 것은 아니지요. 

당시의 주변 약방들의 말로는  다리 병신에,  기술과 면허도 없는 돌팔이가 

아픈 병자를 치료 한답시고 한의원을 차려 버젓이 영업을 한다는 모함이 들어가 

경찰들이 오고 난리가 아니었습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