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 선생님 추모, 추향제가 열리는 필암서원을 다녀 오다
지난 9일 오전 9시를 조금 넘은 시각~
아내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여보~~ 필암서원에서 10시에 하서 김인후 선생님추향제가 열린다네요~
취재 다녀오세요"
8일날 못 다 심은 딸기 모종들을 부리나케 심고 있는데...
도대체 이 사람 뭐야???~~
그래도 불현듯 블로거 정신이 번뜩입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처제에게 다녀 온다는 이야길 하고 ...갔다 왔지요~
필암서원은 자주 갔던 곳이라 건축물의 사진들은 많이 소장하고 있어서 늘 이러한 행사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봄에도 있었지만... 타이밍을 놓쳐 번번히 취재를 못했거든요~
필암서원으로 달려 갑니다.~~씽~씽 ^^&^^
확연루~
필암서원 입구의 문루(門樓)로 서원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진리추구의 엄정함으로 압도할뿐만아니라 네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龜拱包)는 엄숙하면서도 고졸(古拙)한 맛을 풍긴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詩烈)의 글씨다.
중절모의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줄줄이 입구를 가득 메우고 계십니다.
방명록을 확인하며 오랜 덕담들을 나누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오랜 전통 복장과
양복의 어울림이 무척 자연스럽지요?~~
1900년대를 연상하게 함은 왜 일까요?~~
식을 거행할 유생분들이 의복을 갖추시고 단정히 말씀들을 나누고 계십니다.
16세기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 선생을 기리는 추향제와 추모하는 한글 글짓기 백일장 시상식이 필암서원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양자징 선생을 배양한 서원으로 전국 유림이 참여하여 춘,추향제를 봉향함으로써 하서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널리 알리고 국민의 전통 정신 문화 및 청소년의 올바른 국가관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날 추향제에는 김달수 울산김씨 대종회장, 정남호 광주향교 전교, 이상용 장성향교 전교, 정운염 전북향교 고문, 김양수 장성군수, 김성복
장성군의회 의장 각급 사회단체장 등 주민등 200여명이 하서 선생의 영전에 봉심 하였습니다.
글출처- 필암서원 제공 보도자료 인용
하서 김인후 선생님과 양자징 선생의 위패를 모신 [우동사] 앞 입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햐~~ 축문을 작성하고 계셨군요~ㅎㅎ
필암서원 중앙 마당에는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고 계십니다.
사당 입구의 좌측편에 위치한 경장각 에
모셔진 목죽도를 장성에 살면서 처음 접해 봅니다.
매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죽도는 인종대왕께서 계묘(1543년)년에 그리시고, 하서 선생께서 자필제시한 군신합작도로써
보물 587호로 지정된 유물입니다. 당시 유생들이 군신유의를 기리기 위하여 기묘년 (1639년) 모각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뿌리 가지 마디 잎새 모두 다 정미롭고 ( 근지절엽 진정미)
굳은 돌은 벗인양 주위에 들어 있네 (석우정신 재범위)
성스런 우리 임금 조화 짝하신 걸 비로소 깨달았으니 (시각성신 모조화)
하늘과 땅이랑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셔라 (일단천지 불능위)
평상시 보기 힘든 소중한 자료를 볼 수 있는 좋은 시간 이었습니다.
우동사 앞에 줄지어 선 유생들~~~
배례~
정갈하게 손을 씻고 사당안으로 들어 갑니다.~
필암서원은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황룡강변 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효종 10년(1659) 필암서원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2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글출처- 다음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