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여행] 300년 세월 고스란히 간직한 명재고택을 탐방하고 고택의 정취에 흠뻑 빠지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1박2일의 충남 논산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이른 아침 6시 장성발 무궁화 열차를 타고 논산을 갑니다. 기차를 탈때면 늘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마음이지요.
기차와 여행은 언제나 마음속에 그 시절의 동심을 다시 일깨워 주는 행복한 동행이기 때문 이랍니다.
처음 들려 보는 논산역! 오전 8시 늦은 봄의 아침은 이미 이마 높이 까지 솟아 올랐더군요.
논산 시외버스 터미널로 택시를 탔습니다. 다시 공주로 가야 했거든요. 일행과 만나는 곳이 충남 역사 박물관이
위치한 공주이거든요. 40여분을 달려 공주 시외버스 터미널, 오늘 아침부터 대중교통을 모두 다 이용하네요~~ㅎㅎ
바쁘게도 아침을 열었습니다.
충남 공주 역사박물관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행과 합류하여 다시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한
명재고택으로 향합니다.
논산 명재 고택은 대표적인 호서지방의 양반가옥으로써 조선시대 중기의 상류층의 전형적인 살림집이라 합니다.
고택 남쪽으로는 넒고 평평한 바깥공간이 있고 그곳엔 네모진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수공간[水空間]인 방지원도[方地圓島]로 구성하여 전통적인 연못의 기법을 보여 줍니다. 연못의 크기가 검소한 생활을
하셨던 명재 윤증 선생님의 가풍으로 보아 너무 커 보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더군요. 단순한 사대부의 풍류를 즐기는 것을 넘어
가뭄에 마을 주민들의 유용한 수자원으로 사용하는데 한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대문에서 안채가 쉽게 보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은 외부사람의 조심스런 접근과 내부 사람의 독립성을 고려한 완충적인
공간으로 거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한편 사랑채공간도 남성적 공간과 공적인 공간으로 안채와 떨어져 독립성을 주면서도
안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 명재 고택의 지혜이면서 멋이다.
그리고 수납공간인 광채는 안채와 비껴서 배치하여 계절적인 자연현상에 대비한 것은 이 댁에서만이 볼 수 있는 주생활
공간의 세련된 지혜라고 생각된다. 또한 안채를 중심으로 광채와 사랑채의 기능적 배치는 명재 고택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적 탁월함 이다. 또, 후원 속의 장독대는 실용성과 경관적으로 잘 처리된 조경적 지혜라 할 수 있다.
제일 앞쪽에 누마루와 사랑채 그리고 안채가 기능적으로 건축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명재고택 입구 입니다.
오랜 세월 고택과 함께한 배롱나무가 고택 앞 정원에 심어져 집안이 바로 보이지 않게 하는 배려가 보입니다.
명재고택에서 "누마루"의 풍취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 건축물 입니다.
누마루는 별도로 포스팅을 하려 합니다.
배롱나무를 지나 고택 안채로 들어 가는 길에
샘으로 보이는 곳에 향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어 우물물의 차가움을 유지해 주는것 같습니다.
안채로 들어가는 길 또한 직선의 단조로움 보다는 약간의 곡선을 주어 동양의 여백의 미를 살리고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자연스럽게 누마루와 이어져 고택의 풍채가 대단합니다.
안채로 향하는 대문 윗부분을 보면 검게 불에 탄 흔적이 있는데.. 이는 동학군이 쳐들어와 지주들의 집을 불을 지르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 명재 고택은 화재를 면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또한 6.25 동란때는 고택이 북한군의 아지트로 사용되었는데 미군이 이를 알고 비행 폭격을 하려 했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행하던 후손들의 나눔을 받은 주민들의 만류로 자칫 없어질 운명을 넘겼다고 하는군요.
안채와 방문하는 외부인들과의 당황스러운 일들을 없애줄 방벽입니다.
아래쪽을 개방하여 안채에서 바라 볼때 손님들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게 배려한 시설 입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고, 막힌 대문 공간 우측으로 안채를 향하여 열려져 있습니다.
명재 고택의 안채는 충청지방 특색인 평면을 따르면서 독창성을 가지고 있는 구조입니다. 비대칭의 ㄷ자 형의 안채를
대문채가 가로막으면서 동, 서쪽이 열려진 입구[口]의 형태로 안채공간의 안정감을 확보하고 있다.
넓은 대청 마루와 퇴 마루가 연결되어 좌우 공간으 독립성이 확보되어 있다. 안채에서 넓게 자리잡은 대청마루는 제사를
위한 제청및 초례청, 가족들의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안채의 마당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따가운 햇살을 가리는 순백의 천이 마치 얇은 커튼처럼 하늘님조차 함부로 들여다 볼 수 없는 공간의 확보가 이루어지는 듯 합니다.
대청마루 북쪽은 세 칸 기둥사이의 바라지 창이 있어 밖으로 나갈 수 있고, 창을 열면 경사진 언덕에 정겨운 장독대가 보이는
옛스러움이 물씬 풍깁니다. 그런데 이는 창 이라기 보다는 문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좌우의 나무결 모양이 완전 대칭으로
하나의 목재를 켜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1박2일을 머무르면서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대청마루에서 맛나게 먹었답니다.
안채의 동쪽에 위치한 방의 뒤안 입니다.
이곳으로 사당으로 갈 수 있는 작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탐스럽게 핀 분홍빛 작약꽃이 예쁘게 피었더군요.
대청마루 옆 안채 방을 열면 사당으로 바로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구조 입니다.
안채 동쪽 뒤안 매실나무 심어진 언덕에서 담아 본 고택 풍경입니다.
안채에서 동쪽 사랑채로 나가는 작은 문에서 바라본 사랑채
아침 햇살이 영롱하게 사랑채 여닫이 문 창살을 비춥니다.
무지 무지 고풍 스럽습니다. 한참을 앉아서 바라 보았습니다.
방과 방을 통해서 갈수도 있지만 독립성을 주기 위해
퇴마루가 연결되어 방과 방 사이를 이동하기 편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특히 아침 햇살이 방창살 사이 창호지로 환하게 비추도록 설계되어 있어 부지런한 옛분들의 지혜를 볼수 있습니다.
동쪽 하늘로 향하는 사랑채 앞쪽으로 수백개의 장독들이 햇살을 받아 더욱 윤기가 나는군요.
퇴마루에 앉아 덜깬 아침잠을 서서히 깨우며 잠시 사색의 시간을 갖는것도 아주 멋스럽습니다.
뒷편 사당으로 가는 담벼락~
굳이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고도 사당을 향할 수 있게 하여 동선을 고려한 고택의 구조입니다.
물지개가 담벼락에 걸려 있군요.
어릴적 방학을 맞아 시골을 방학 내내 있으면서 물지개도 참 많이도 져 날랐던 추억이 생생하게 생각나는 순간 입니다.
물지게를 질때는 좌우 물통에 똑같은 양의 물을 담아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답니다.
조심히 온다해도 이내 신발과 종아리쪽은 흥건히 젖는게 예사 였지요. 특히 잔칫날 아침에는 열댓번의 물지게를 날라야 하고,
으스름한 저녁이 찾아오면 쇠죽을 끓이기 위해 커다란 가마솥을 가득 채워 넣어야 했었거든요.. ㅎㅎ
양쪽 고리에 물통에 가로질러진 나무 걸쇠에 걸고, 양손은 고리를 움켜 쥐어 잡아야 흔들리지 않고 길어 올수가 있지요.
안채의 서쪽 방향에 있는 광채사이로 뒤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안채에 딸린 부엌의 윗부분을 보면 연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가로막이 있습니다.
안채의 방으로 연기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한 배려와 지혜가 돋보이는 시설입니다.
뒤 안을 갔더니...글쎄 얼마만에 보는 김치독 인가요.
땅에 묻어진 김치독~ 햐 그 맛이 충청남도의 김치 맛 입니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여 그 맛을
오래 할 수 있는 지혜이지요~ 우리 집 뒷 마당에 김장독 한번 묻어 볼까?~ㅎㅎ
아침 햇살의 고느넉함이 장독대를 풍부하게 감싸도 돕니다.
대청마루 부분의 뒤안을 향한 바라지 창문들 세개가 보이시지요?
창호지와 살로 된 문이 아니고 나뭇결무늬가 서로 대칭인 판자통문 이랍니다.
뒤안 바라지 창문을 열고 안채 대청마루를 통해서 보는 안채의 정경~
가족들과 오손도손 이런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고택에서 천년만년이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지는 순간 입니다.
명재 고택의 지붕은 특이하게 조성되었는데 그 형태가 창경궁의 연경당과 같다고 합니다.
명재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160호 이며, 윤증 선생이 생존하였던 1709년에
그의 아드님들이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윤증 선생님은 이곳에서 살지 않으시고 니산[尼山]의 유봉[酉峯]이라는 곳에
유봉정사를 짓고 거기에서 기거하시며 1714년 돌아가실때까지 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노성산 기슭에 자리잡아 산의 능선에 의하여 감싸 안겨 있는 모습으로 인접한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의 형태 입니다.
충남은 예로부터 양반의 고장, 선비의 고장, 충절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그만큼 충남은 유교문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유교적 색채가 강했던 곳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고 또 이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 왔던 것이지요.
기호유학의 중심에 서 있는 명재 윤증 선생님의 고택에서 만나는 인문학 이야기에 매료되는 시간들 이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 하나 차분히 담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