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옆에 있어 행복합니다.
여보, 너무 감사해요! 우리가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별들과 달님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맹세 해온 지도 열 두 해 하고도 한 해를 새로 시작하고 있구려. 아마도 90년 초봄으로 생각 되오, 필연 과도 같은 우연으로 목포 시내의 모 학사주점에서 당신은 일일 아르바이트 학생으로, 나는 주제넘게도 어깨 넘어 훔친 얄팍한 음악으로 DJ를 보았었지요…
처음으로 목포 땅을 밟아 이 곳 저 곳 기웃하다 시작한 일인데, 그것이 당신과 나와의 부부의 연의 출발이 아니었던가 하오. 더욱이 아는 것이라곤 이름 석자뿐인 서울의 촌뜨기를 서스럼없이 맞아주고 반겨줌에 나는 더 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오. 조금의 시간이 흘러 내 마음을 고백하던 날, 참으로 그 날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구려. 오후부터 내린 눈이 우리가 바닷가 찻집에서 마음의 고백을 부끄럽게 풀어 놓을 때까지 쉬임 없이 내렸었지요. 정말 지금 생각해도 가슴 설레는 행복한 기쁨이구려.
이렇게 우리는 사랑을 키웠고, 하지만 조금씩 다툼은 있었지만 우리는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는 사랑의 시련으로 우리를 더욱 하나로 만들어 주는 명약이 되지 않았나 하오. 이듬 해 1월, 새 해가 밝은지 몇 일 안된 새벽, 당신은 엄마로서의 첫 출산의 고통과 나는 아빠로서의 초조함과 설레임을 환희로 승화 시켜 준 우리의 큰 딸, 푸른하늘이를 건강하게 낳았지요.
세상에 둘 도 없는 하나님의 고귀한 생명과의 첫 만남은 형언할 수 없는 벅참으로 내 심장은 콩딱콩딱 요동을 쳤었오. 감동과 가슴 저 깊은 구석의 벅차 오름은 나를 흥분 시키기에 충분 했었오. “여보! 다시 한번 고맙고 수고 했어요” 지금 내가 당신에게 솜씨 없는 글로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시간, 당신과 옆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둘의 네 공주들이 제 각각 가장 편한 자세로 꿈의 대화를 나누고 있구려.조심스럽게 당신 곤히 자는 얼굴을 들여다 보니 스물 두 살의 아리 따웠던 얼굴이 세상의 풍파에 많이 변했구려. “여보!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결혼식도 여건상 올리지 못해 당시 야간학부에 다니던 목포전문대 가을 축제 때, 행사 중의 하나인 전통혼례를 빌어 조촐하게 올렸던 잊지 못할 혼례였었지요. 나름의 낭만은 있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내내 당신에게 미안함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다오.
큰 아이를 낳고 두 해가 더 지나 당신은 푸른태양이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고, 여러 해가 지나 푸른초원이를, 그 이듬해 당신과 나의 잠정적 마지막 공주, 푸른별이를 안겨 주었지요. “여보! 진심으로 감사해요” 지금까지 아이들이 별 탈 없이 건강히 성장 해 줌에 감사하고 고마워 할 뿐이요.
낮 선 타향 전라도에서 서울 촌뜨기는 행복해 질 수 있었고 당신으로 인해 소중한 네 공주들을 얻을 수 있었오. “여보! 진심으로 사랑하오. 지면을 빌어 이야기 함에 미안하오”
정말로 행복하고 달콤한 시간들이 지나…… 2002년 6월 지자제 선거가 있던 날 새벽, 갑작스런 토혈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1개월의 중환자실에 감금됐던 운명의 시간의 시작이었지요. 바로 하루 전 회사에 휴가를 내고 당신과 아이들과 경주 불국사를 다녀올 계획으로 저렴한 비용에 회사 체인 콘도까지 예약을 해 놓았는데…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은 그렇게 시작 되었오. 진단은 간경변으로 인한 식도 출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고, 오로지 수혈과 릥겔액을 달고 있어야 하고, 병원 제조의 출혈 응고제를 먹는 것이 전부 였지요.
그 때 나는 당신의 소리없는 눈물을 보았오. 잠도 오지 않는 중환자실 귀퉁이의 초췌한 당신의 모습,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의 시간들의 연속이었지요. 대소변을 받아 내야 하고, 받아 내도 받아 내도 누런 똥 색은 보일 기미를 안 보이니.. 한시도 자리를 뜰 수 없는 당신의 아픔, 나의 육체적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내 양팔에 무수히 뚫려 화산 분화구 같은 주사 자욱들, 혈관이 굳어 보이지 않으니 손 등과 발 등으로 이어지는 …… 술을 너무 좋아한 나의 지난 과거들이 주마등처럼 지나면서 회한의 쓰라림들이 몸부림치지만 돌이킬 수 없음에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수 없이 했었지요
멈추지 않는 식도의 혈로 변의 색깔이 중환자실 20여일 동안 내내 검정 물변으로 계속되었지요. 귀여운 네 공주들이 햇살에 그을려 거무티티한 모습으로 아빠를 찾아와 “ 아빠, 힘내세요, 아빠, 많이 아퍼!” 하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내 가슴에 파고들 때는 가슴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내 눈물과 아픔은 당신과 아이들의 고통에 비하면 몸에 묻은 먼지보다도 작았습니다. 아마 그 때 온 세계는 월드컵의 축제에 빠져 있을 때 였습니다. 지금도 잊지를 못합니다. 막내 푸른초원이와 별이가 앙증맞은 붉은 악마 T-셔츠를 입고 앵두 보다도 더 이쁜 입으로 “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 외치던 작은 행복을…….
이내 한국팀 경기가 있는 날은 경기를 보고 결과를 가장 먼저 말해 주려 달려오는 내 사랑하는 공주들! 여보! 삶의 용기를 재충전 할 수 있는 희망을 넣어 주었지요 “여보! 미안하오, 그리고 고맙소” 한국팀의 승전보는 나에게 삶의 강렬한 욕구를 주기에 충분했다오.
TV로 한국 선수들의 훌륭한 경기를 볼 수 없었지만 나는 무척 기뻤다오. 중환자실의 무서움과 슬픈사연들은 눈물 바다 였으며 잔잔한 감동들 이었고, 삶의 의지를 불태워 준 생사의 갈림길 이었음을 잘 알거요. 폐렴이 너무 심해 사형선고를 받은 40대 초반의 남자,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 하듯 난동 부리는 형국은 중환자실의 또 다른 공포 그 자체 였지요. 그의 어머니의 깊은 슬픔의 눈, 평생 고생한 아내의 불치병으로 산소마스크를 의지한 채 눈동자만이 살아 있는 50 후반의 여자, 그 아주머니의 지극 정성의 남편, 정말 나를 부끄럽게 할 정도의 지극 간호였지요. 간암의 말기로 아랫배에 복수가 넘쳐 항상 불룩한 배를 움켜 잡고 비명에 가까운 절규를 하며 통곡해 하는 70의 할아버지, 내가 중환자실에 들어와 5일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생을 마감하셨던 할머니, 정말 꽃 다운 나이인 22살의 여대생, 그 부모의 밤낮없는 슬픔의 통곡은 당신을 참으로 많이 울렸지요. “여보! 고맙소. “
당시 유월 말의 어느 날로 기억하오.
여보! 나는 지금도 그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 선하다오.
“엄마, 집에 가고 싶어” “왜 집에 안가는 거야!” 엄마! 물 먹고 싶어요” 물 좀 주세요 “……..
참으로 그 새벽 소리없이 많이도 울었오. 질흙 같은 어둠 속의 무심한 달을 보고 참으로 많이 울었오. 잠이 달아 난지 오래고, 또 다시 펜을 잡고 노트에 일기를 쓰기 시작 했었지요. 쉽게 넘나 들던 그 아이의 집, 엄마에게 보채지 않아도 손 쉽게 먹을 수 있었던 냉수 한 잔도 못 마신다. 어머니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중환자실의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엄마 얼굴을 보여 주는 것 외에는…………..
그 아이 어머니의 찢어지는 아픔이 내게도 전해 오는 듯 했지요. 당신도 옆에서 나와 같은 생각 이었겠지요. 내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 새벽은 눈물로 지샌 밤으로 기억하오.
이 글을 옮기는 지금도 두 눈에 따스함이 느껴 지는구려…. 여보! 감사하고 미안하오. 중환자실에서 출혈의 지혈 작용이 차도가 없자 비타민 K의 혈관주사 처방 후 갑작스런 약물쇼크로 지옥과 천당을 왔다 갔다 한 일.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당시의 상황은 지금껏 투병의지를 퇴색케 할 만큼 고통이 컷지만 내 손을 꼬옥 잡아주는 당신의 사랑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오.
창 밖의 보이는 작은 자연이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푸르름 이었지요. 저녁에는 달과 별들과 벗을 하고, 이른 아침 떠오르는 해님의 열정이 내 눈이 확인할 수 있어 살아 있음을 느꼈고, 작은 콩 밭 황무지에 녹음이 짙어지는 콩 나무와 벗을 하고, 참새와 까치들의 어울림에 좋은 소식을 기다렸지요. 날씨는 점점 한 여름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는 듯 수은주를 달구었지요. 네 번의 위내시 시술로 출혈 부위를 동여 메는 작업이 있은 후 ……..
나는 드디어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오.
당신에게 감사하오. 사랑하오. 여보!
병실로 옮긴 후 2주가 지나 퇴원을 해도 된다는 의사의 말이 정말로 하느님의 음성같이 들렸었지요.
여보! 당신에게 너무 너무 하고 싶은 말들을 왜 가슴속 구석에 감추어 두고 처 박아 놓았는지 나도 모르오. 너무 흔해 식상해지고, 빛이 바랜다 해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당신을 꼬옥 안고 당신에게 얘기 하고 싶소. 감사해요, 죄송하고 나로 인한 당신과 아이들이 충격받았을 시련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찢어지지만 굳건히 자리를 지켜 주고, 건강하게 커 주어 충심으로 감사하오.
한 달여의 병원 생활이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된 것이 사실이요. 무수한 환자들의 애절한 사연들과 병의 아픔보다 더 소중한 깨달음으로 삶을 다시 살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오. 재발의 소지도 있고 이미 간경화로 들어선지라 적극적인 병의 관리가 따라야 하지만 나는 이겨 낼 준비가 되어 있소. 또한 변함없는 지고지순한 당신의 사랑이 지켜 주고, 아이들의 밝고 맑은 웃음이 명약이 될 거라 굳게 믿고 있소.
여보! 벌써 9개월이 흘렀구료, 참으로 세월이 빠름을 느끼고 있소, 그 좋아하던 술도 이제는 영영 이별을 고했소. 네 공주들도 설을 쇠니 한 학년씩 성장하여 6학년, 3학년, 유치원, 다섯 살이 되었구려 대견하고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20Kg이나 빠졌던 몸무게도 10Kg이 돌아와서 그 험했던 몰골도 제자리로 와 주었구려.
여보! 지금 밖에는 매화, 진달래, 개나리, 벗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들 있지요. 오늘 밤은 바람도 꽃 구경을 떠난 듯 잠잠하오. 이번 식목일과 한식에는 작고 앙증스러운 새 희망의 묘목을 심어 봅시다. 그리고 이름표를 달아 줍시다. “ 가족 사랑의 힘” 이라고 …
여보! 오늘밤은 편히 주무시오. 네가 오늘은 그대와 아이들의 불침번을 자청하오.
아이쿠, 막내 별이가 낮에 맘껏 뛰어 놀더니 이불에 지도를 그렿구려 걱정일랑 접어두고
편히 쉬구려……..
-2003년 4월 어느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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