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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여행]벗꽃이 필때 찾으면 더욱 운치 있을 것 같은 익산 백제왕궁터 왕궁리오층석탑

푸른희망(이재현) 2013. 1. 26. 11:30

미륵사지석탑을 본떠서 만든 국보 제 289호 백제계 왕궁리 오층석탑


잠시 바쁜 농사일상에서 지난해 12월이 익산여행 추억을 옮겨본다.  익산여행을 할때부터 무척 설레임이 강했다. 처음 가보는 백제 무왕의 왕궁터의 장엄함도 그랬고,  4색종교 올레길의 즐거움 또한 컷다. 백제 30대 무왕이 천도하여 건립한 남북 500미터, 동서 250미터의 왕궁터로 무려 3000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현재도 발굴조사가 한창인 곳이다. 바로 옆에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을 상시 전시하는 익산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역사기행 하는데 참 좋은 곳이기도 하다.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백제의 왕욱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유적은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왕궁유적과 사찰 유적이 함께 남아 있다.  발굴, 조사결과 백제 무왕(600~641)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말에서 신라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은 그 규모가 성벽을 쌓고 나서 내부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지었는데, 왕궁 내에서 물과 조경석을 이용한 조경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적지에는 왕궁 건물터와 금당 등의 사찰건물터가 여럿 남아 있다.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 석탑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왕궁리 유적에는 마한의 기준 도읍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최근의 연구로 백제궁성의 구조와 기능등 역사 속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어 왕궁리 유적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는 연구가 열리고 있다.  1997년 1월 대한민국 국보 제 289호로 지정되었다.


벗꽃나무에 벗꽃들이 순백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를 생각하니 그 운치가 장관일 듯 싶다.



진사들의 유명한 사진촬영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오랜 장구의 1400여년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상함에 실로 고개가 저절로 숙여질 뿐이다. 멍하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오랜 숨결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으로, 높이가 9미터인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 옥개 받침등이 특징적이다.  1965~66년에 해체 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제 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에서는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같은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어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었다.  석탑 밑에서는 가로 16.8미터, 세로 12.7미터인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 기초를 보면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는 왕궁사, 관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 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신라시대 명문기와가 여럿 출토되었다. 지금도 이 탑의 축조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초" 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단다.


왕궁리 유적 전시관 내에 별도로 왕궁리 오층석탑의 해제보수 및 발굴된 유물들에 대한 사진전이 전시되어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을 둘러보고 반드시 유적 전시관을 돌아 볼것을 추천하는 곳이다. 



오층석탑에서는 금제방형사리함, 유리사리병, 순금금강경판, 금동여래입상, 청동주칠 도금 사리외함,등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도굴꾼에 의해서 도굴되어진 흔적들이 있어 그것들이 무엇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 아닐수 없다. 


얇게 연마되어 올린 탑층과 층 사이의 옥개석의 좌우 네 귀부위를 보면 마치 살짝 접어 올린 듯한 부드러움이 목조탑의 형식을 잘 보여주는 듯 하다. 


한 자리에서  1400여년을 찬란한 아침햇살의 기운을 받고, 모진 비바람, 된서리, 모두 이겨내고 우뚝이 서있는 그 장엄함이 마치 우리 민족의 수난사 같기도 하다.



[유적 전시관 내의 왕궁리 유적지 모형] 

보면 볼수록 참으로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그 화려하고 융성했던 백제무왕 시절의 건축양식들이 고스라히 사라지고 너무도 외롭게 오층석탑만이 남아있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이곳이 이리도 후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었는데...오랜 세월의 풍파로 사라짐이 너무도 가슴 아파 오층석탑만으로라도 꿋꿋히 변치않아 그 실체를 보여주고 싶었던 애절함이 있었을까?.......



왕궁리 오층 석탑의 장엄함을 보고나서 바로 옆의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서 더욱 자세한 왕궁리 유적지와 발굴된 유물들에 대해서 살펴 볼 수가 있다.


과연 백제무왕시절 화려했던 그 왕궁터가 복원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날은 올수 있을까? 마음으로라도 성심을 다해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