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성큼 성큼 다가오는 듯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영하의 기온을 보이지만~ 시나브로 느껴지는 기다리던 봄은 착~착~ 우리들 바로 옆까지 와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동학혁명 승전 기념탑 둘러봄에서 누락되었던 " 이 학승 순의비"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장성의 김 채림 문화해설사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고 오후에 시간을 내어 가 보았습니다.
주변에 매실과 감나무밭의 과수원 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설명을 듣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자리에 있었지요.
이렇게 찾았습니다. 몇번이고 왔다가 허탕을 친 뒤라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순의비 바로 옆에 나무들이 식재된 밭이 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데... 순의비 바로 옆에 비로 인해 토사가 흘러내려 매우 위험해 보였습니다. 동학혁명에 역사적 자료가 비록 동학혁명군의 드높은 의미와 거리가 있다 하여도 반드시 알아야 될 지난 역사이기에
주변에 보존하기 위한 안전한 장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한말 항일운동에 앞장을 서셨던 74세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님께서
비문을 작성 하셨다 합니다. 잠시 인물에 대해 알아 봅니다.
자료출처:http://kr.blog.yahoo.com/drims21/5342 드림21의 블로그에서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당시 유림을 대표하던 면암 최익현이 이에 극력 반대하며 한 말이다. 이처럼 최익현은 대체로 개항·개화·개혁을 반대하고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유지시키려 한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척사운동이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기능을 수행했다는 평가 이면에는 반외세적 자주운동이었다는 측면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기울어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버팀목이자 거유(巨儒)였던 면암
흥선대원군·고종과도 맞선 대쪽 같은 선비
최익현(崔益鉉·1833~1907)은 본관이 경주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菴)이다. 1833년 지금의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하고 골격이 평범하지 않았으며 눈에 광채가 서리는 등 ‘기이’한 점이 많아 어릴 때 기남(奇男)으로 불렸다고 한다. 4세 때 가세가 어렵게 되자 단양으로 이사하였고, 11세 때 양평으로 옮긴 후 인근에 사는 당대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면암이라는 호는 스승한테서 받은 것이다. 면암은 훗날 이항로의 신도비명을 지었을 뿐 아니라 강수계(講修契)를 조직하여 스승을 선양하는 활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면암은 승문원부정자·지평·정언·이조정랑·신창현감·장령 등을 역임하고 1870년에 동부승지를 지냈다. 신창현감으로 재직하던 때에는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자 미련 없이 벼슬을 내던졌으며, 경복궁을 다시 지으려는 흥선대원군에 맞서 당백전의 혁파와 원납전 및 문세(門稅) 징수 금지를 주장하는 등 대궐공사를 중지함으로써 백성을 구제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다. 또한 1873년에는 상소를 올려 만동묘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서원 철폐를 단행하는 등의 정책을 비판함과 동시에 이제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대원군과 고종 사이를 이간했다는 대신들의 공격을 받아 3년간 제주도로 유배되기도 하였지만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이학승 : : 갑오 동학농민군 혁명 초토사 홍계훈의 부하 이학승은 경군 200명을 지휘,
황룡면 월평리 전투에서 동학군과 싸우다가 전사함. 자료내용 ->큐비여행정보
맑은 날 바라본 동학혁명 기념탑 ~ 이제는 소리없는 그날의 함성만이
들리는 듯 합니다.
동학혁명 농민군과 경군의 황룡 싸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합니다.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은 경군 8백명을 거느리고 4월 4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6일 군산항에 상륙했다. 다음 7일 오후 전주(全州)에 입성하니 공교롭게 전라감영군이 황토현에서 패전한 날이었다. 홍계훈의 경군(京軍) 병정들은 사기를 잃고 공포를 느껴 도망병이 속출할 지경이었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이 지금 정읍, 흥덕, 고창, 무장고을을 휩쓸고 있는데도 출격하려 하지 않고 전주에 머물며 전주영장 김시풍을 모역(반역을 모의함)으로 몰아 처형하고 감영수교 정석희를 고부민란때 전봉준과 내통했다는 죄로 처형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겁을 먹은 홍계훈은 정부에 병력의 증파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4월 16일 총제영 병정 5백명과 강하 포수 3백명을 증파했다.
홍계훈은 4월18일에야 전주를 출발 영광으로 향했다.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은 홍계훈에게 병력 일부를 전주 수성군으로 남겨달라고 요청했으나 홍계훈은 이에 응해주지 않았다. 관군은 태인(泰仁), 고창을 거쳐 4월 21일 영광에 도착했다. 홍계훈은 종사군관 이효응 배은환으로 하여금 윤음(왕의 친서)을 전달하려 동학농민군 진중으로 보냈는데 도리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영광(靈光)에 머물고 있는 초토사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이 함평에서 장성으로 향했다는 함평현감의 보고에 따라 대관(隊官) 이학승 원세록 오건영에 병정 3백명과 구르프포 1좌(坐) 회선포 1좌를 주어 장성으로 출동시켰다.
4월 23일(陽 5월 27일)에는 황룡에 유진하고 있는 동학군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함평에서 장성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은 때마침 월평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관군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불의의 기습으로 동학농민군은 40-50명이 전사했다고 전봉준은 그 공초에서 말했다. 당시 관군의 포격은 동학농민군들에게는 기상천외의 신무기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패하여 도망치지 않고 역습해 나갔다. 수적으로 우세한 동학농민군의 역습에 양군의 거리가 가까워 포전이 불리한데다 '정태전법'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육박해 오는 돌격에 신식 훈련을 받았다는 경군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군을 추격한 끝에 구르프포 1좌 회선포 1좌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관군은 구르프포와 회선포를 잃은 외에 대관 이학승과 병정 5명이 전사했다. 황룡싸움에서 유명한 것은 동학농민군의 '장태전법'이었다.
장태전법에 관한 금성정의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전봉준은 함평에서 대를 베어다 장태를 만들었는데 하나의 둘레가 몇 아름이며 길이가 몇 10발이나 되는 장태를 여러개 만들었다. 장성 월평리에서 경군(京軍)과 싸우게 되었다.
전봉준은 군중에 령을 내려 "청을(靑乙)자를 써서 등에 붙일 것이며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입은 앞 옷깃을 물고 엎드려서 장태를 굴려 나가는데 옆을 돌아보지 말것이니 이렇게 하면 적군의 포환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군이 바라보니 어떤 커다란 물체가 굴러오는 뒤에는 보졸(步卒) 수 천명이 엎드려서 몰아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군 측에서 포를 쏘아대니 죽는자가 무수 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싸맨 사람들이 일어나서 포를 쏘고는 다시 엎드렸다. 그들은 좌우를 돌아보지 않으니 옆에서 죽고 사는 것을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홍계훈이 경군은 신식 훈련을 받은 병정들이고 또 신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이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오는 동학농민군에게 쫓겨 영광방면으로 도망가다가 5리쯤 나가서 신호리 마을 뒤 구릉에서 대관 이학승은 후미에서 동학군과 최후로 향전했으나 전사하고 말았다. 지금 이 곳에는 이학승순의비(李學承殉義碑)가 있고 1996년 동학농민군전승기념탑을 세웠다.
동학농민군은 고부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고 10여일 후에는 또 장성 황룡에서 홍계훈의 경군을 격파하였으니 이제 천하무적의 강군으로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4월 24일 동학농민군은 장성에서 전주로 향했다. 전주 감영(지금 도청)을 점령하기 위해서이다.
동학농민군은 정읍, 태인을 거쳐 26일 원평에 이르렀다. 때마침 관군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사금(下賜金) 1만냥을 가지고 서울에서 내려온 선전관(宣傳官) 이주호와 수행원 2명을 체포하고 이에 앞서 왕의 윤음을 가지고 왔다가 장성에서 동학농민군에 포로로 잡힌 초토영 종사관 배은환등 5명을 원평장터에서 참수했다.
자료출처 :동학농민혁명 홈페이지
http://donghak.jeongeup.go.kr/new/revolution/summary_05.html
동학농민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이학승을 추모하기 위해 장성의 유생들이 세웠다 합니다.
(1897년 건립, 높이 159cm)
거듭 거듭 생각할 수록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는 이뿐만이 아니라 6.25 동족상잔 비극을 비롯해, 4.19, 5.16혁명,
80년 광주항쟁~~ 열거하면 무수하지만 진정한 민주화를 향한 민중들의 항거였습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주듯 비문에 낀 흔적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멀찍이 동학혁명 승전 기념탑과 떨어진 순의비~~ 결코 가까워 질수 없었던 역사의 뒤안길 입니다.
반봉건, 반외세에 대항하였던 농민군의 하늘을 찌르는 기세는 당시 힘으로 누를 수 없었던 민중의 분노 였습니다.
두둥실 구름이 우뚝 솟은 기념탑 위에서 세월의 덧 없음을 느끼게 합니다.
이 땅 이 하늘아래 농민군의 숭고한 의미 되새기며 삼가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합니다.
경군과 농민군으로서의 만남은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비극이라 아니 할 수 없겠지요~~
비문 옆의 주변 과수밭에는
머지않아 꽃망울을 터뜨릴 매화가 한껏 부푼 꿈을 토해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는 반드시 쓰여져야 합니다.
아픔을 딛고 웅비하는 새 역사, 민족의 영광을 이루기위해 역사는 참 교훈을 던져줍니다. 나라와 민족을 함께 위하는
조금 더 나은 생각들이 집결되어 세계속의 한국, 한국속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더 이상 민족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짓밟고 일어서서는 절대로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어깨동무 두둥실 ~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웃을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장성 오시면 황룡에 유적지 역사 여행을 하시는 것도 유익한 역사 바로 알기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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