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행복보금자리

아버지는 제게 커다란 영웅 이셨습니다.

푸른희망(이재현) 2011. 5. 13. 06:30

5월 8일 어버이 날이 휭~하니 지나가 버렸습니다.  오늘은 오래전 아버지를 애써 담아 보려 합니다.

 

아주 오래~  아버지 3살 유아 시절~ 청천벽력의 치유될 수 없는 평생지고 가야 할 소아마비 병마가 아버지를 급습하고 올가미를 채우듯이 찾아 왔었지요.  큰 아들에게 뗄래야 뗄수 없는 악마와 같이 착 달라 붙어 있는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천방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명의를 찾아 다니셨던 할머니의 애끓는 모정이 하늘은 감동 시켰을 지언정 아버지의 증세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지요.

 

아들의 구부러지고 휘어진 다리를 고칠수만 있다면 할머니께서는 쥐꼬리 같은 소문에도  달려가 희망을 부여 잡았었습니다.  때로는 돌팔이에게 무지막지한 고통을 당하며 감내 해야 했던 아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눈물로 지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임을 알았을 때  아버지의 할머니의 마음의 고난의 세월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학교라고는 교문에도 들어 서보지 못하신 아버지~셨습니다.

당신의 처지를 신세한탄으로 지세었다면 오늘의 제가 있을 수가 없었겠지요~  비록 신체는 불구로 산다고 해도 배움의 길을 터주시기 위해  조부모님께서는 한문 獨 선생님을 두어 한문을 가르치셨습니다.  배움에 열정을 다하신 아버지께서는 천자문, 사서 삼경까지 독파 하시고,  2년여가 지나 마을 아이들의 훈장으로 되려 가르치는 위치에 서시게 되었지요~  당신의 병에대하여 자세히 알고자 자연스럽게  한의학에 관심을 두어 정규 과정의 한의학을 공부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당시 인근 일대에서는 명의로 소문이 자자 했었지요~~

 

오늘은 그런 아버지가 참 많이도 생각이 납니다.   1993년도~  벌써 열 여덟 해가 지나가고 있군요...  

 

아래의 사진들은 옷장 속의 낡은 사진첩을 들추어 다시 카메라로 담아 보았습니다.

 

1987년 아버지의 유일한 이동 수단 이었던 삼발이 오토바이,  이걸 타고 서울 면목동에서 충북 단양 도담 삼봉 까지 달리 셨습니다.  이때까지도 건강하게 사셨던 때라    설마 6년 뒤에 찾아올 검은 그림자를 예견조차 할 수 없었지요~~  가장 시원한 웃음으로 웃으시는 아버지가 너무나 존경 스럽습니다.

 

평범한 정상인들도  삶에 굴복하고 목숨을  쉬이 버리는데... 강렬한 삶의 열정으로 모진 풍파 이겨 내시고 누구보다 강하게 사셨던  너무나 자랑스러운 아버지 , 바로 저의 영웅 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참 좋아 하시던 시 입니다.  저 또한 그러하구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드로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것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

그리고 또 지나간 것은 그리워 지는 것이니..

 

1991년도  장애인 동료분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셔서~~  이때 시골에 홀로 계신 할머니와 함께 여행을 다녀 오셨었지요~  옆의 아저씨 두 분은 아내 분과 함께 했습니다.

 

왜~~ 어머니가 안계시냐구요~?  ........ 

어머니는 제게 또 다른 아픔 입니다.  정신박약이셨던 어머니는 제가 6학년때 가출을 하신 뒤로 연락이 단절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어찌 살고 지내시는지~ 어머니 사진 한장 없습니다.  제 아이들에게는 친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늘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입니다.

 

어머니 ~ 그 이상의 할머님 이십니다.  저와 제 동생들은 할머니께서 키우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모진 세월 마음으로 속앓이를 앓아 오신 그저 평범한 어머니~ 할머니 셨습니다.  할머니께서도  아버지 돌아가신 다다음해 영영 돌아 오지 않으실 먼길을 떠나셨습니다.

 

방학때만 되면 올라 오셔서 저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 가셨었지요~  그래서 12개월중 60여일은 충청도 시골에서 생활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존해 계신다면 86세가 되시지요. 

 

 할머니~~ 그 먼곳에서 두 다리 멀쩡한 당신의 아드님을 다시 만나셨는지요~?

 

제주도 공항 입구에서  "어머니와 아들" 이 나란히 포즈를 ~

 평생 휠체어와 목박을 달고 살아야 했던 아들을 지켜 보신 할머니~~ 이제는 정말 편안하시기를 기도 합니다.

 

장애인 동료들과 야유회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마도  멋진 키타리스트를 꿈꾸셨었나 봅니다.

 

한탄강  강물 낮은 곳에  몸을 담가 보시기도 하고~  아버지 그립습니다.

 

제주에서 동료분들과 유채꽃을 뒤로 하고 나름 멋진 포즈를 잡으셨었습니다.

 

서부의 카우보이 처럼  멋지게 승마도 하시고~

아버지  너무 멋지셔요~!

 

커다란 돌 하루방 앞에서 그리움을 영원으로 남기셨습니다.

 

 

1992년, 전남 목포에서 큰 손녀 "푸른하늘"이의 백일을 축하해 주시러  먼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찾아와 주셨었지요. 

 아버지는 이후로도 푸른하늘이의 첫 돐까지 보시고 1993년도에 한국인들에게 많이 찾아 오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렇게 지난 추억의 사진을 보면서  다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병환을 다스려  안그래도 힘들고, 아픔으로 점철되어 살아 오신

남은 여생을  좀 더 편히 살게 해 드리고자  지극정성을 다하고 싶습니다.

 

마치 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영생토록  제 곁에서  살아 계실줄 믿었습니다.

하지만  유한 한 인간의 삶에 무한 한 영생은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 신의 영역 입니다.

 

손녀를 보시고 너무도 좋아하셨던  감격스러워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 합니다. 

 

 

아버지는 늘 오래전 버스를 타실때는  엔진룸이  지정 좌석 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버스를 찾아 볼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엔진이 버스의 앞 부분에 운전석 바로 옆에 둥그렇게 타원형으로  있었지요.  목발로 다니시지 못하는 곳이 없을 정도로 왕성한 체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휘어지고 세워져 있는 발로 인해 아버지의 구두는 늘 바닥에 닿는 면이 고정 되어 있었지요.

 

아버지는  평생 구두가  2~3켤레 이셨습니다.   닳아서 없어지는 부위에는 덧대어 수선해서 신고 다니셨으니...

 

이제는

어버이날 ~ 카네이션 달아 드릴 두 분이 아니 계십니다. 마음 한 구석이 늘 허전 합니다. 

 

아버지~~!!  

 제 아이들 사진 입니다.  하늘이 뒤로  태양이, 초원이, 별이~ 당신의 손녀가 셋이 더 생겼어요~~

 대견 스러우시지요~~아버지!

 

아버지의 험난하셨던  인생길이 제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법 답안 같은 커다란 나침반이 되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