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우리들의 이야기

오랜 친구와 함께 찾아간 장성의 청백리의 상징 박수량 백비

푸른희망(이재현) 2012. 1. 14. 13:30

지난 6일에 오랜 친구가 왔습니다.

참 고마운 벗이지요.  훌쩍 성장한 딸아이와 함께 온 친구가 너무 반가웠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고 있어서 자주 볼 수는 없지만, 가끔씩 소식 주고 받으며 우정을 잃지 않습니다.

6년전 간이식 수술에 5백만원이라는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친구들이 있어서 지금 제가 이렇게 농사를 지으며  웃을 수 있답니다.

 

친구들아~!  딸기 따러 안 올래?~

 

친구와 함께 들른 "박수량 선생의 백비" 묘소 입니다. 

정말 가까운 곳에 있어도, 마음으로 가보자 가보자 했는데... 이렇게 친구 부녀와 함께  참배를 합니다.

정말이지~ 묘비에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 백비" 입니다.

 

아이들의 어릴적 모습 입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아이가 바로 " 보람"이 입니다.  정말 많이 컷죠?

제 세째녀석인  초원이와  나이가 같답니다.~~

 

친구 딸아이, 보람이 입니다.

딸기 꽃 앞에서 신기한 듯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네요~

 

 

 

아빠와 둘이서 열심히 딸기체험을 합니다.

 

아빠~!  예쁜 것들로 따야 돼?

 

야~임마!  딸기들은 다 이쁜거야~~

 

부녀간의 대화를 몰래 엿듣습니다.~

 

 

 보람아~ 아빠가 더 많이 땃지?

 

와~ 울 아빠 많이 땃네~~

 

친구야~ 어찌까?  ㅎㅎ

네 얼굴 공개해부렀네~~ 예쁜 보람이까정~~! 

 

친구가 장성 유정란 농장에 함께 가보자고 해서  이동을 했습니다.

젊은 청년 농업인이 야심차게 사육하는 유정란 농장,  겨울철 건강하게 사육되는 농장도 둘러보고,  아이가 참 좋아하는 모습에

친구도 넉넉한 미소를 지었답니다.   유정란 60알을 구매했더니.. 한 판을 더 챙겨주는 젊은농업인이  인심이 후덕하였네요`~

 

장성 청년 ceo 유정란 포스팅 가기  http://blog.daum.net/jhle7/8910586

 

농장에서 싱싱한 유정란을 사가지고 나오는 길에 위치한  "박수량 선생의 백비"를 들렸지요

흰 눈이 내려있는 선생의 묘소가 더욱 그 의미를 빛나게 하는 듯 합니다.

 

본관은 태인. 자는 군수(君遂). 아버지는 종원(宗元)이다.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급제한뒤 승문원부정자·전적·예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그뒤 고부군수·보성군수·성균관사성·내섬시정·군기시정 등을 역임했다. 1534년 함경도경차관이 되어 지방 관아를 순시중 안원보권관(安原堡權管) 전주남(全周男)이 마음대로 야인(野人)들에게 우마를 준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가 투옥되었다.

 1536년 동부승지·좌승지·나주목사, 1537년 함경도관찰사, 15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지냈다. 1546년(명종 1) 동지춘추관사로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뒤 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후 경기도관찰사·호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생전에 주세붕(周世鵬)과 교유가 깊었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출처-다음검색]

 

 

장성 황룡면 금호리 노송 우거진 마을 뒷동산에는 조선시대 청백리로 알려진 이의 묘가 있다.

38년이 넘는 벼슬살이 동안 집 한칸 없이 가난하게 살다 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본을 보여 준 박수량(朴守良·14911554)의 묘다.


청렴했던 그의 한생애를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 무덤 앞에 세워진  백비
(白碑). 즉 글자를 하나도 새기지 않은 빗돌이다. 그의 유언이 이러하였다. <내가 초야로부터 외람되게 정이품(판서)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는데, 분수에 넘는 영광이다. 내가 죽으면 절대로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비()를 세우지 말라.>


고작 한 줌도 안 되는 공적을 이리저리 치장해서 으리으리한 비석을 세워놓는 일 쯤이야, 당시에도 당연히 있었을 터. 그러나 그는 죽어서까지 청백리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이가 죽고 나서 남긴 유품은 당시 명종 임금이 하사했다는 술잔과 갓끈뿐. 서울에서 그의 고향 장성까지 오는 장례 운장비도 없어 나라에서 일체의 장례비용을 치러줬다 한다.


비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 그의 유언이었지만, 당시 임금이었던 명종의 뜻에 따라 비가 세워졌다. 명종은 오직 덕과 예, 충과 효로써 사사로움이 없이 고결한 인품으로 살다 간 그를 기리기 위해, 서해 바다 암석에서 돌을 골라 하사하고 비를 세우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비에는 아무 글도 쓰지 말게 했다. 새삼스럽게 비문을 새긴다는 것은 그의 청백함을 오히려 훼손할지도 모른다는 뜻에서였다.

다만 그의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해 이름을  백비라고 부르게 하고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박수량은 젊은 시절 시골의 학자이던 김개(金槪)라는 스승 밑에서 공부하여 모든 경전에 밝았고 선비로서의 모든 자질을 갖췄다.

23세이던 1513(중종 8)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그 다음 해에 문과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백성을 위하는 정사를 펴 참판과 판서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이권이 크다는 함경도와 경기도의 도백은 물론 서울시장인 한성부 판윤을 여러 차례 지낸 벼슬아치였지만 늘 가난을 달고 살았으니 참으로 깨끗하고 청렴한 그의 벼슬살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모범이었다
.


박수량의 지극한 효성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몸져 누웠을 때,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를 시중했으며 어머니의 임종 즈음에는 몇날 며칠이고 날을 새우는 효성을 보였다 한다.

 

[출처- 다음 검색]


 

묘소를 둘러싼  소나무들이 무척이나 푸릅니다.

박수량 선생의 묘소와 백비 앞에서 청렴한 마음을 다짐하고 돌아간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보이는 듯 합니다.

 

친구와 함께 담아 봅니다.

친구는 무엇을  마음에 넣었을까요?

푸른희망 재현이는 또 어떤 마음을 넣었는지 궁금하시지요.

 

묘소 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금호리의 평야 입니다.

저기 앞의 산봉우리 앞에는 장성 홍길동 테마파크가 건립이 되어

의적 홍길동의 일대기를 두루 구경해 볼 수 있지요~

 

정말 묘비에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친구와 함께 찾은 박수량 선생 백비~

많은 생각을 품고 돌아 갑니다.~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위치가 어떠하든지,  바른 생각을 갖는 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농부로서 청렴한 마음으로 농사를 지어야 예쁜 빨강미인들을 생산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