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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주년 삼일절을 맞아 장성의 삼일운동 역사 유적지를 돌아 봅니다.

푸른희망(이재현) 2012. 2. 29. 06:00

 

28일엔 일본에서 사시는 처형께서 한국에 나온지 2주정도를 보내시다  일본으로 가시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장성역에 배웅을 다녀 왔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 읍내 도로에 펄럭이고 있는 태극기들을 보면서

삼일절이 돌아 왔음을 실감 합니다.  마침 인근에 위치한 장성공원의  삼일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를 돌아 보았지요.

 

1919년 4월 3일 북이면 모현리 일대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당시 활동한 애국지사 유상설, 신상우 선생외 11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72년 9월 30일 장성군 삼일운동 열사 기념 사업회에서  이 곳에 건립을 했다고 합니다.

 

 비석의 좌우 옆으로는 열사들의 이름이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구국의 일념으로 일제치하의 삼엄함 속에서도 항거하며 

국가와 민족, 자유 수호의일념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메아리가 가슴속에 울림으로 느껴 지는 듯 합니다.

 

 

일본에 사시는 처형을 장성역에서 배웅을 합니다.

막내 별이와 처남이 함께 갔었지요.  그러고 보면 일제 식민지 치하의 잔혹함에 이를 갈면서도

많은 한국인들이 멀고도 가까운 일본에서 많이들 거주하는 것 같습니다. 잔혹했던 일제치하의  식민지 역사를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지금도  올바른 역사인식을 하지 못하고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 그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성읍의 중앙로  거리마다  태극기의 물결이 가슴 벅차 옵니다.

 

골목 이곳 저곳에서 마치 물밀듯이 밀려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장성공원에 함께 한 막내 푸른별이와

처남 입니다.  외삼촌과  조카가 오늘 아주 특별한 역사알기 데이트를 합니다.

 

 

 

이번엔  조카녀석이 외삼촌의 어깨에 손을  올립니다.

140여 계단을 올라가면  장성읍이 내려다 보이는 조그마한 언덕 입니다.

 

 

논산훈련소 신병 교육대에서  훈련병이 잘못 투척한 슈류탄을 몸으로 직접 막아내 많은 목숨을 건진 박 은주 상병의  추모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보다  동료 전우들의 생명을 위해 초개같이 던진 정의는

누구도 따라하기 힘든 의로운 행위 입니다.~  삼고 고인의 의적비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1966년 9월 1일 장성공원에 건립한 호남창의영수 기삼연선생순국비

 

기삼연(1851~1908)은 전남 장성 출생 의병장이다.
1895년 국모시해의 변을 당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주회맹소(光州會盟所)에 모였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뜻을 펴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구금당했다. 어느날 기삼연을 존경하던 평리원장(平理院長)의 은밀한 지시로 탈옥하여 산중에 들어가 은신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일어선 기삼연은 1907년 9월 영광의 수록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대장이 되었으며, 전국에 격문을 살포하고 상소문을 작성하여 예식원(禮式院)에 보내는 한편, 『대한매일신보』에도 기사를 보내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고창의 적을 야습하여 일병(日兵)을 섬멸하고 무기를 다수 노획한 후, 영광을 거쳐 광산과 장성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는 군세가 크게 떨치고 위용이 당당하여 적이 감히 넘보지 못하였으며,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칭송되었다. 다음해 1월 은신처를 습격한 적과 총격전을 벌린 끝에 탄환이 떨어져 적에게 체포되어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대한광복단 

 


 

 

 

 

1981년 3월 11일  건립된  충혼탑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 동란 당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자유를 위해 산화한 2,739위의 영혼을 위로하고 애국충절의 정신을

후세에까지 널리 기리고자  장성군 순국의열 충혼탑 건립 위원회에서 조성한 곳 입니다.  ▼

 

 

 

1972년 9월 30일에 건립된  삼일운동열사 장성 의적비 입니다.▼

 

장성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당시 활동한 애국지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이다.
1919년 4월 3일 화전회(花煎會)를 빙자하고 평촌초당(平村草堂)에 모인 유상설(柳相卨)등 동리 유지들은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상의하고 마을사람 약 2백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앞에 들고 모현리(茅峴里) 일대를 행진하였으며, 부락의 남·녀·노·소가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사거리 헌병대에서 주동인물 4명을 색출하여 끌고 가자, 신상우(申商雨)등은 이튿날 다시 마을 사람들과 만세를 부르며, 헌병대로 몰려가 구속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응원대의 지원을 받은 헌병들은 군중을 해산시키고 다수의 부상자를 내며, 8명을 추가로 체포하였다.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계속 외쳤으며, 4일 밤부터는 진원(珍原) 등 각 면에서 봉화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시위는 계속해서 군내 각 면으로 확산되었고, 한편 앞서 체포된 애국인사들은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하였으나 의지를 굽히지 않고 항변하였으며, 결국 수년간씩 옥고를 치렀다.

 

출처-대한광복단   ▼

 

삼일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 옆에는

독립선언서문이 새겨진 비석 입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포 하노라~~"

 

중학시절 국어책에 실렸던 가슴 벅찬 글을 대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하던

오랜 추억들이 주마등 처럼 지납니다.~

 

 

 

제 딸아이의 가슴속에 새겨질 우리 지역 삼일 운동의 살아 있는 역사들이

더욱 뿌듯해지는 오후 입니다.

 

멀리 장성읍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합니다.

장성의 중앙에 위치하여  언제나  군민들의 마음속에 삼일정신이 아로 새겨져 선조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정신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29일 아침에 다시 장성 공원의 삼일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를 찾았습니다.

1일에 있을 삼일절 행사로  관련 공무원분들께서  청소를 하고 계시더군요.

장성 관내 모든 초,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모두 알수 있도록 역사 바로 알기 학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의적비를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  대한광복단 홈페이제에서

삼일사우 라는 북이면 모현리의  1919년 4월 3일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13인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 있음을 보게되어

다녀 온 곳입니다.  초기에는 13분의 후손들이  함심하여 합동 위령제를 모시다가  1989년에 창건 되었다. 

 

3·1사는 기미독립열사인 신경식, 유상능, 유상설, 고용석, 정병모, 신상우, 신태식, 신국호, 유상학, 유상순, 박광우, 오상구, 신종식 등 13열사의 의행과 투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사 지내는 곳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이면 모현리 주민 신태식외 4명이 서울로 올라가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문을 입수하여 고향에 내려와 그해 4월 3일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3열사는 왜병에게 피검되어 광주지법에서 징역 6월부터 2년까지 선고받았으나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여 각각 6월씩의 감형으로 유상설, 고용석은 1년 6월,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호는 1년, 유상학, 유상순, 오상구, 박광우는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처 - 대한광복단

 

 

마침 외삼문이 조금 열려 있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삐꺽~ 하는 소리가 왜그렇게 가슴속을

파고드는지...당시의 위급하고 비장했던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삼일사는 사당과 재실,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재실은 고유한 팔작지붕의 구조 건축 양식으로 지어 졌습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구조 입니다.

화강석 기단 위에 정평주초를 놓아 원기둥을 세워 굴도리를 올리고,  원기둥 위 장여와 굴도리 사이에 소로를 놓아 수장하였다.

 내삼문은 어칸이 높은 솟을삼문이고, 원기둥과 소로, 굴도리를 놓아 맞배로 꾸며 마치 사당과 그 양식이 비슷합니다

 

내삼문의 기상과 위용이  당시의 드높은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의 포효과도 같이

힘이 넘치는 듯 합니다. 우리의 고택들의 일반적인  출입은 오른쪽이 입문이고, 왼쪽이 출문 입니다.

 

이곳이 13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

가장 안쪽 에 위치해 있지요.

 

삼일사 앞에 우뚝 서 있는 비문 아래단에는 당시의 많은 모현리 주민들의 만세 함성과 함께 당장이라도 걸어 나올 듯한 기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진정한 애국, 애족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되새겨 봅니다.

 

 일제침략에 대한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항거로 평가받고 있는 북이면 모현리의 삼일사우에 모셔진 13인의 숭고한 뜻이

오래도록 잘 보존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재는 과거 목숨을 초개같이 구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밑거름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삼일사우를 둘러 보고 내려 오는 길에  한 아주머니께서 마을 길을 걸어 오시길래 

 

" 독립만세를 부른 곳이 촛대봉이라고 하는데  그 곳이 어디 인가요?" 하고 여쭈었더니

" 바로 저기여~" 하시며 마을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앞산을 가리키십니다.

 

바로 삼일사우 앞에 위치한 곳이 아주머니 댁이십니다.  이것 저것 답해 주시며 음료수 한잔을 주신다며

마당을 들어서자  눈에 보이는 것이 벽면에 걸려진 " 독립선언서" 가  빼곡히 써진 액자가 눈에 들어 옵니다.

독립유공자 집안이시라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독립 선언서 입니다.

 

말씀을 나누다 보니  바로 이분이 13인 분중에 한분 이셨던 " 신 상우" 선생님의 손부 이십니다.

92세로 세상을 뜨셨는데.. 일경들에 의해 혹독한 고문으로 손 끝이 심하게 짖눌리셔 흉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면서 생전의 모습을

잠시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36년간의 일제 식민치하의 암울했던 역사속에서 짓밟히고, 찢겨지고, 멍들어 울부짖던 고통의 시간들속에서

100년이 가까워 오는 작금에 친일의 역사가 정리되지도 못한 채 우리는  진정 정신적 독립을 이루었는가? 하며  의문을 던져 봅니다.

아직도 속으로는 침탈의 야욕을 들추어 내는 그들의 망언과 역사 왜곡, 신사참배의 제국주의 야비함에 분노를 자아내게 합니다.

 

역사라는 것이 단순한 암기하여 시험을 보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제대로된 역사인식 만이 대한민국의

찬란한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역사 의식이 올바로 설 때 또 다시 그러한 치욕의 역사는 반복 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다시 한번 목청껏 외쳐 봅니다.~

 

대 한 독 립 만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