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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 변이중 선생님과 봉암서원을 만나다

푸른희망(이재현) 2011. 2. 27. 13:59

지난 2월 23일엔 모처럼 날씨가 완연한 봄기운이 가득한 날이었습니다.

평소 마음에 있어 가보지 못했던 "봉암서원"을 들려 보려 장성 문화해설사 님께 위치와 관리인의 전화번호를 문의 했습니다.

거의 서원가까이 왔을때  전화를 했습니다.

 

"변 선생님~ 봉암서원을 취재좀 하려 합니다.  문 좀 열어 주실 수 있나요?"

 

나도 못되었지요.  사전에 연락약속도 없이 문앞에서 대뜸 열어주라니.....

 

"어디 누구신가요?"

 

"장성의 블로그 활동하면서 농수산식품부 징검다리 서포터 활동하고 있는 아무개 입니다."

 

조금 망설이시는가 싶더니

 

"언제 오시게요?"

 

"어쩌지요~~ 지금 봉암서원 가까이 다다랐습니다."

 

"어쿠~저런, 미리 연락 주셨으면...... 가까운데 있으니 곧 가지요"

 

내심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전화 통화를 끝내고 조금 더 차를 몰아 들어갔습니다.

마을의 입구가 모두 시원하게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마을 여기저기에 아름드리 보호수 들이 참으로

많은 마을 입니다.  가히 수백년씩은 되어 보이는 것들 입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이 "삼강정려 " 입니다.  그리고 [시징당]이 반깁니다. 이 곳  설명은 마직막 부분에 설명을드리지요.

 

 

 

봉암서원의 첫 관문,  "두남문"이 보입니다. 숙종때의 학자 호곡 홍수주 선생의 상량문에

[先生道東 千年斗南一人] -선생은 도동에서 천년에 하나 나올까말까 한 분으로 북두성 남쪽의 오직 한분이시다." 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 합니다.  대문 저 깊숙히 "봉암서원"의 현판이 뚜렷히 보입니다.

 

봉암서원의 연혁에 대해 설명 합니다.

 

1697년 숙종 23년 호남유림의 공의로 망암 출생지인 장성읍 장안리 봉암산 아래 창건, 이듬해에 변이중 선생님 봉안

1707년 숙종 33년 자하 변경윤 선생 추배, 1728년 영조 4년 율정 윤진, 청류당 변휴 선생 추배

1868년 고종 5년 훼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1975년 장성 유림과 후손들이 서원 복원 추진결의

1981년 10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지정

1984년 망암 변이중, 자하 변경윤, 율정, 윤진, 청류당 변휴 봉안 및 휴암 변윤중 선생 추배

1989년 시징당 건립  화차, 화포 등 무기 전시

1992년 묘 정비와 복원비 건립

1997년 효헌공 변치명 선생 추배로 오늘에 이름

서원 규모 부지 2068평, 건물 9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용출처- 봉암서원 제공 안내문

 

 

 

 

 

이곳은 "시징당" 으로

화차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지금은 내부수리 공사중으로 아마도 3월 말에나 공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 뜻은 시경에  "오랑캐는 응징해야 한다는 뜻에서 취했다 합니다. 1989년 완공된 이 전시관은 1986년 전남도에서 망암 문집을 참고하여 제작한 화차, 총통, 신기전, 포통, 등 임진왜란시 사용되었던 무기 모형 18종이 전시되어 있다.

 

 

 [시징당에 대한 설명안내문]

 

 

[시징당] 뒤편으로 마을 안쪽에  그 오랜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수백년의

마을 느티나무가 그 위용을 자랑합니다.   아마도 저 오랜 木人은 모든 것을 다 지켜 보았겠지요.

새삼  숙연해 집니다.

 

[고직사] 입니다. 

이곳은 봉암서원을 관리햇던 분들이 가족단위로 기거하며 살았던 곳입니다.

봉암서원의 전답을 농사지으며 서원을 관리하는 세경으로 충당하며 생활을  했던 곳이랍니다.

지금은  세월의 흐름만큼~ 역사적 의미만을 담고 있는 건물이지요. 

 

 

담장 넘어 "봉암서원"을 대표하는 [성경당] 이 보입니다.

많은 인재들이 수학을 했던 곳이지요. 글을 읽은 소리가 마치 들리는 듯 감개가 무량합니다.

 

 

자~ 두남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보이는 성경당의 뒷 모습입니다.

특히한 것은 보통 정면을 바라보고 문들이 있는 구조인데, 여기는 창문만이 보입니다. 아마도 뒤쪽을 앞쪽에 배치하는

구조로 학업에 몰두하려는 모양같습니다. 

 

 

작은계단을 올라 좌측을 끼고 돌아서면 보이는 성경당의 정면과 서쪽에 [경의재]  동쪽 방향으로 [훈덕재]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성경당은  문하생들이 학업을 하던 강당입니다.

동재, 서재로 불리는  훈덕재와 경의재는  문하생과 청강생들이 묵었던 기숙사 이지요.

변 이중 선생님의 후손이신 " 변 동혁"님께서 경 내를 안내하고 계십니다.

 

 서재-[훈덕재]                                                                 강당-[성경당]                                                                동재-[경의재] 

 

 

이쯤에서 잠깐 望菴 邊 以中 선생님에 대하여 알고 넘어가지요

 

자료출처-다음백과사전인용

1546(명종 1)~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임진왜란 때 군기(軍器)와 군량 조달에 공이 컸다. 본관은 황주.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庵). 아버지는 택(澤)이다.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소모어사(全羅道召募御使)가 되어 병마와 군기를 모아 적의 공격에 대비했으며, 1593년 정월에는 양호지방(兩湖地方)의 군사를 모집해 천안군과 양성현 일원에 주둔하면서 훈련시켰다. 그때 새로운 우차(牛車)를 제작, 죽산성전투에서 사용하여 처음에는 성공한 듯했으나, 적이 쏘는 불화살에 맞고 불타버림으로써 실패했다. 이어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순찰사 권율(權慄)을 따라갔다. 그해 2월 12일 행주산성전투 때 자신이 쓴 〈총통화전도설 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 火車圖說〉의 내용에 따라 화차를 만들어 화차 300량을 권율에게 보내어 승리를 거두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했으며, 자신은 양천산(陽川山)에 진출하여 도왔다. 그뒤 조도사와 독운사 등을 역임하며 군량미 수십만 석을 명나라 군대에 보급했다. 1603년 함안군수가 되었다가 1605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저서로는 〈망암집〉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자료출처-서원제공 팜플렛

22세 성균생원, 27세 문과 초시, 28세 문과 급제후 출사

39세 황해도 도사에 재직중 스승인 율곡선생 별세시 그 가족을 도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43세 남원제독에 제수후 평안도 도사에 재수되었다.

이천, 선산부사, 상주, 성주 목사등을 역임후 성균관 전적 함안군수봉 직을 끝으로 귀향 , 60세에 호성원종 1등, 선무2등 공신으로 기록되고

선생 별세후 증정원 도승지및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61세 고향에 돌아와 여러 벗들과 경전토론 및 진원현과 장성현 합병에 따른 민심수습책으로

향헌 20조를 만들어 고향 민심 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후손이신 " 변 동혁" 선생께서 서원 내를 두루 살피시고 안내하시면서 자세한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선생님께서 보고 계신 곳은 "엄온문"으로  변이중 선생님의 학문과 그 의지에는 엄정하고 곧았으며,  인정에 따뜻함을 모두

겸비하고 계셨던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하십니다.   세월의 격세지감과 후손으로서  그 얼마나 뿌듯하실까요~! ^^*

 

 

 

여기는 엄온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위폐를 모신 사당으로 " 종앙사"라 합니다.

이의 어원은  숙종때의 학자 호곡 홍수주 선생 상량문에, " 大賢爲 一代之師" (크게 어지시어 일대의 스승이 되시니) 뜻을 취하셨다 합니다. 오른편에 보이는 "관세위"  손과 얼굴을 정갈히 씻는 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생님에 대한 지극한 추모를 엿볼수 있습니다.

새로 복원이 되면서 오랜 "주춧돌들이 원내의 네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봉암서원 복원비

 

고직사의 현판과  뒤안 그리고 고직사에서 바라보는  두남문의 자태~!

여기서 [고직사]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서원 노비들이 기거하는 고직사는 교직사, 관리사, 주소, 주사 등으로도 불린다.
고직사는 비록 노비들의 공간이지만 향사 때는 많은 참관인이 숙식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개의 고직사들은 당당한 기와집이었고 건물의 구성도 좌우 대칭의 격식을 갖춘 것이 많다.

 고직사의 기능은 서원 노비들인 원지기의 주거기능, 재생들의 식사와 세탁 등 잡일을 하는 보조 기능,

제사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기능, 식량이나 용품을 보관하는 창고 기능 등으로 이루어진다

                                                                                                                                        내용출처- 다음문화원형 인용

 

 

 두루 두루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고 두남문을 나서시는  변 동혁 선생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갑작스레 전화를 드렸음에도 흔쾌히 응해 주시어  대한민국 조선의 역사의 큰 획이신 망암 변이중 선생님의  숭고한 역사적 의의를

다시금 되새기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변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

시징당 리모델링이 완성되면 다시한번 미완의 취재 마칠께요~~^^*

 

 

아~  잊을뻔 했군요.. ^^

봉암서원을 찾아 오는 길에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는 "삼강정려" 입니다.

이곳에 대하여  변 동혁 선생님께서  바쁜 걸음 잠시 멈추시고 재차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휴암공 변 윤중 선생님(1548~1597년)을 반드시 설명드려야 합니다. 

사촌종형이신 변이중 선생님을 도왔던 정말로 의로왔던 분이십니다.자는 공신, 호는 휴암이며 참봉 홍의 아들로 천품이 탁월하고 문무를 겸비했다. 상의원 직장시 임진란을 당하여 임금을 용만(의주)까지호종하였고, 환궁때 향리로 돌아왔다. 종형인 망암을 도와  전재산을 털어 화차를 성공리에 제작하니 그 공이 지대한 분이시지요.

 

정유재란때 왜군이 침입하므로 가복과 장정등 200여명과 같이 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실패, 마을 뒷편 부엉바위에서 황룡강에 투신 순절하니 부인 함풍 성씨도 뒤따라 투신순사 하였습니다.  윤중 선생님의 아들 형윤과 그 며느리 장성 서씨 부인이 이 소식에 급히 부엉바위로 가보니 부모님 시신이 나란히 떠 있었다 합니다.  얼마나 원통하지 않을수가 있겠습니까?  ..... 이를 보고 아들 형윤이 따라 죽으려 하자 부인이 남편을 말리며 와아들이 죽으면 손이 끊어지니 내가 대신 죽겠소 하며 강물에 몸을 던졌다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당당히 살아 다른 방법으로 부모님의 뜻을 받들 수는 없었는지 안타까움이 밀려 왔습니다.   

 나중에 뒤늦게 이사실을 안 조정에서  일문 삼절을 알고 윤중에게는  통정대부 이조 참의를 증직, 삼강정려가 내려 졌다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절개와  일부를 향한 열녀의 순절에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시간 입니다.   

 

조국이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는 휴암 변 윤즁 선생님의 높은 뜻을 아로 새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삼가 고인들의 깊은 뜻에 아주 오랜 뒤인 오늘 길손이 머리 숙여 추앙 합니다. 

 

 

전남 장성군 장안리 봉암산 자락 아래에 건립 되어 있는 "봉암서원"  이곳 장성을 들리신다면 반드시 꼭  방문하여  그 분들의 숭고한 뜻을 새기는 알차게 좋은 교육의 시간과 애국 충정의 정신을 담아 가는 것도 좋을 것이라 사료 됩니다.  황룡면 필암리의 하서 김인후 선생님의 "필암서원"도 함께 들리시면 자녀분들의 교육에 산 교육이 되시리라 강력 추천합니다.

 

봉암 서원 입구에 세워져 있는 민족의 수난 6,25 당시의  처절하게 산화한  마을 분들을 위령하기 위한  "충혼탑" 과  조선초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영사정" 이라는 정자도 답사할 만 합니다.   이곳은 다음에 간략히  다시 취재할 생각입니다. 

 

봄이 찾아오려 하는 길목에서  하우스 일을 잠시 놓고  둘러본 내 고장 장성의 역사 문화 유적지  오늘은  망암 변이중 , 휴암 변윤중 선생님의 모시는 "봉암서원"을 다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