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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을 찾아가도 새로운 기분으로 둘러보게 되는 조선의 대표 유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의 얼이 깃든 필암서원

푸른희망(이재현) 2012. 12. 28. 06:00

몇번을 찾아가도 새로운 기분으로 둘러보게 되는 조선의 대표 유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의 얼이 깃든 필암서원


 중학교 딸아이들 방학을 하루 앞둔 12월 27일, 그러고 보니 2012년도 딱 사흘을 남겨 두었구나... 짧은 시간 온갖 소회가 몰려온다.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잠시 이른 아침 필암서원으로 방향을 돌렸다. 장성 읍 방향 저멀리 제봉산에서 둥그런 황금을 닮은 아침 해가 가슴 벅차게 솟아 오른다. 차를 멈추고 잠시 손폰으로 담아본다.  12월 27일 아침을 여는 해와 2013년 1월 1일 새해를 여는 태양이 뭐가 그리 다를까마는  끝날에 떠오르는 해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태양의 등장은 마음속에 느껴짐이 다를것이다.  하루의 시작과 끝! 반드시 태양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준다.  일년의 시작과 끝에도 어김없이 용광로의 뜨거움 같은 희망에너지를 선사한다. 내일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난 오늘 최선을 다한다.  필암으로 가는 길에 떠오르는 가슴벅찬 해를 바라보면서 ...^^


 손폰을 잡고 있는 두 손이 무척이나 시리다. 며칠전 내린 눈이 아직도 조금은 지붕에 있어서 다행이다. 눈이 소복히 내린 필암서원의 부속건물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었다.  가까운데 있어도 설경을 잡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멀리서 동이 트고 있는  아침 햇살을 받는 필암서원의 관문!  확연루의 풍광을 담아보려 발을 동동거리며, 연신 입김을 불어 손을 녹였다.  비록 카메라는 아니지만 나름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2층 18칸 13평, 필암서원 입구의 문루로 서원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진리추구의 엄정함으로 압도할 뿐만 아니라 네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龜拱包]는 엄숙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씨다. 지붕에서 부터 서서히 아래로  비추어지는 햇살이 참 좋다.


멀리 제봉산 자락의 능선을 넘어 솟아오르는 12월 27일의 아침햇살



확연루 입문을 지나 들어오면 눈 덮힌 마당과 기와 담장, 그리고 오랜 고목인 은행나무의  웅장함이 마치 수문장처럼 두 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앞쪽의 기와 지붕과는 달리 흰 눈이 소복히 내린채로 녹지않고 겨울의 운치를 더해준다.





 문루인 확연루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강당인 "청절당"  15칸 26평, 중앙은 대청, 좌우로 협실이 있고, 옛 진원현의 객사 건물을 옮겼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이 쓴 청풍대절 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여 청절당 이라 이름하고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로 편액이 걸려 있다.  


  필암서원은 하서 선생에 대한 제사의 공간과 교육 및 학문 수련의 공간, 그 밖에 장서 공간이나 지원 시설 공간등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서원이다.  이곳은 호남 지방의 유종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1510~1560] 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1523~1594]을 배향하고 잇다. 김 인후 선생이 죽은 뒤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 황룡강변에 사우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때 수원이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황룡면  증산동으로 옮겨  세웠다.   


 효종 10년[1659]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 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수해를 입어 현종 13년[1672]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고 1789년  양자징도 함께 모셔졌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필암서원 청절당 및 동재[진덕재]와 서재[숭의재]에는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로 현판이 걸려 있다.  필암서원이라는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조선후기 성리학자 권 상하의 문하생인 윤봉구의 글씨다. 숭의재 옆으로 인종이 하사한 묵죽의 판각이 소장되어 있는 자그마한 경장각이 있는데 이 경장각의 현판은 정조대왕이 하사한 어필이다.  그러고 보면 필암서원의 곳곳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흔적들이 참 많이 묻어 있는 곳이다.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청절당 지붕과 안 마당에도 역시 태양과 등지고 있어 소복히 쌓여 있다.



장판각에서 바라보게 되는 우동사 측문과 기숙사로 쓰이던 진덕재가 보인다. 멀리 필암서원 선비학당의 훈장이신 노강 박래호[아곡 박수량 선생의 16대손] 선생님이 매월 15일과 초하루에 지내는 추모를 모시고 나오시는 모습이 보인다.


필암서원에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숭의재와 경장각이 보인다.  숭의재는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으로 6칸 13평이며 대청과 좌우에 협실이 있다.  경장각은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의 판각을 보관하는 곳인데 3칸 4평, 하서 김인후 선생을 문묘에 배향코자 할 때 정조가 내탕금[內帑金]으로 세웠다.  경장각은 필암서원의 부속건물중에 확연루와 함께 팔작지붕의 형태로 작지만 화려한 단청이 눈길을 사로잡는 건축이다. 동서남북으로 세곳 추녀 모서리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한 곳은 봉황이다.  진덕재, 숭의재, 청절당, 장판각, 외 기타 관리 사옥들은 밋밋한 민가건축양식이지만  경장각과 우동사, 확연루는 단청의 화려함이 뛰어나다. 그 중에 단연코 경장각이 제일임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1510년 장성군 황룡면 맥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 또는 담재이고 본관은 울산이다. 8세에 조 원기 전라관찰사가 "장성기동 천하문장" 이라 할 정도로 학문에 뛰어났으며,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정자가 되고 퇴계 등과 같이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로서 세자인 인종의 사부였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한 후 인종의 건강을 염려하여 약[藥]을 의논하기를 자청하지만 거절당하자 옥과로 귀임 하였다.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하서는 인종을 지극히 사모하여 승하한 7월1일이되면 집 남쪽 난산의 통곡단에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인종이 변고로 승하하니 벼슬을 버리고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충절을 지키며 고향에서 오로지 학문에 전력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써 정철, 조희문,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이지남 등 제자를 배출하였다. 


 하서는 이퇴계, 조남명, 서화담과 함께 유학이 절정기에 이른 16세기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 하서의 스승인 모재 김안국이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요 조광조와 동문이다. 하서는 소학을 바탕으로 대학, 중용, 효경, 주역, 논어, 태극도설, 시경, 을 평생토록 정독하고 연구하여 자신의 도학사상을 정립하였다.  하서는 주자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이를 공자의 사상과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천지간에 오직 두분이 계시니 공자가 원기라면 주자는 참이로세[天地中間有二人  中尼元氣紫陽眞]라는 시는 훗날 정조대왕의 감탄을 자아냈다.  정조대왕은 1796년 하서를 문묘에 배향케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령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를 추증하였다.


 종묘는 이씨 왕조의 종통을 이은 제왕들의 신주를 모셔 왕권을 상징하는 곳이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와 그 제자들을 모시고 우리나라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18명의 어진 문인의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하는 곳이 문묘다 바로 학문과 사상의 상징이다.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의 안유와  정몽주, 조선의 퇴계와 율곡,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의 배향된 곳이다. 많은 선비들이 빗발치게 상소를 했지만 하서가 타계하고 237년이 지난 정조 10년(1786)에야 호남에서 유일하게 배향되었다. 

[출처] 하서김인후 下|작성자 청랑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已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물절로 산수간에 나도절로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이라 늙기도 절로 절로 하리라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 인종이 승하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에 내려와 있으면서 "시가 아니면 바로 설수 없다" 할 정도로 많은 생각을 시로 표현하였다.  하서집에는 1600여수의 한시가 전한다. 그 중에 40대 중반 무렵에 지었다는 자연가를 읋조리면서 2012, 임진년을 사흘 남겨둔 날 아침에 필암서원을 찾았던 감동을 끝맺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