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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가족여행]보물같은 딸들과 함께 삼십년만에 찾아간 신륵사 가족여행에서 느끼는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푸른희망(이재현) 2013. 6. 12. 15:32

[신륵사가족여행]보물같은 딸들과 함께 삼십년만에 찾아간 신륵사 가족여행에서 느끼는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정말이지...삼십년만에 찾아간 여주 신륵사 여행이다.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에 딸기농부가 태그되어 올라온 글에 "여주군 농업기술센터 초청 여주 농촌체험 팸투어" 라는 글귀에 내 시선은 고정되었다.  늘 마음에 있던 중학교 수학여행의 추억속에 머물러 있던 여주 신륵사를 볼수 있겠구나 하는 기쁨과 놀라움이 딸기농부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글을 보자마자 아내에게, 딸아이들에게 6월 1일의 여주가족여행을 이야기 했다.  모두가 좋아한다.  아이들이 지금처럼 성장해서 다 같이 여행을 가본 시간이 없는 듯 하다.  대학 졸업반의 아이도 좋다 하고, 아내도 기분 좋게 승낙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있는 세째는 이리저리 궁리해도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대학 1학년의 둘째도 알바를 하는 빵집이 있어서 시간을 비우기가 어렵다. 아쉽지만  아내와 막내 별이, 별이친구 샛별이, 그리고 아산에 있는 큰 딸아이를 데리고 여주로 기분 좋은 여행을 했다.  삼십년만에 마음속 소원을 풀었던 여주 신륵사 여행 시작합니다.~^^  신륵사가 건너편에 보이는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이튿날 일찍 눈을 떠 딸기농부 혼자 사전 답사겸 다녀와 다시 또 가족들을 데리고 찾았습니다.


사진은 보물 228호의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부도와 석등 그리고 석종비 앞 입니다. 둘째와 세째가 함께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사진 입니다. 삼십여년전 어릴적 그때는 몰랐던 보물들이 이리도 많은 신륵사 인줄 이번 여행에서 보고 느끼고 왔답니다.


 가족들과 함께 사진에 담은 바로 이 자리가 제 앨범속에 한 장 남아있는 중학교 수학여행의  바로 제가 서서 사진을 찍었던 그 자리입니다. 아침 내내 앨범을 뒤적이며 그 때 그 사진을 찾았는데... 안보입니다.  앨범속에 있었는데.. 차분히 다시 찾아 봐야 겠어요.  세상살이가 뭐가 그리도 빡빡해서 삼십년이라는 세월동안 이곳을 여행한번 하지 못했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딸기농부 스스로가 답답해지더군요.  그 때는 혼자였지만 삼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삶의 인연으로 만나 사랑한 아내와 그 사랑의 보물들인 천륜으로 맺어진  딸아이들까지 데리고  그 자리를 찾아왔습니다. 순간 가슴속에 벅차게 차오르는 그 무엇이 뭉클하게 감격스럽더군요.  한참을 떠나질 못하고 재촉하는 아이들의 아우성에 이끌려 신륵사 경내를 둘러 보았답니다.


봉미산 신륵사의 황금글씨 현판이 두드러진 일주문! 보통 사찰은 일주문을 지나 가야 그 운치가 제대로 인데..바로 옆에 관람권을 끊는 매표소가 있고 그 앞으로 일주문이 있다.  울타리 식물이 둘러쳐져 있어  그저 사진만 달랑 담고 가는게 많이 아쉽다.




 남한강가 쪽으로 입구길 쪽으로 가다보면 신륵사의 사찰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오로지 기억속에선 다층전탑외에는 대체 떠올려 지질 않으니.... 멀리 삼국시대부터 서울의 마포나루, 광나루, 여주의 이포나루와 함께 4대나루로 유명한 조포나루가 보입니다.  아마도 저기 보이는 돛단배가 그 때의 상선을 복원해 놓은 듯 합니다.  1963년도에 초등학생들이 수학여행 왔다 이 조포나루에서 도선을 하다 무려 49명의 학생들이 익사한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 후로 조포나루는 폐쇄되고 여주대교가 개통되었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의 비문앞에서 잠시 묵념을 해봅니다.



토요일 아침 7시의 아침이라 관람객은 오직 딸기농부 혼자 입니다.~ㅎㅎ 고즈넉한 천년고찰의 신륵사를 독무대로 구경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제일 먼저 남한강변의 암반 위에 축조된 강월헌 정자와  화강암을 깍아서 만든 삼층석탑으로 향합니다.   슬그머니.. 삼십년전의 추억들이 봄날의 아지랭이처럼 일어납니다.  그 때 그 동창생들 다들 어디서 무얼하는지...궁금도 합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다층전탑! 보물 제 226호의 [다층전탑]이 웅장하게 삼십년전으로 돌아간 중학생의 소년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바로 이 다층전탑 앞에서 삼십년전에 사진 한장 담은게 신륵사 기억의 전부인데도 말입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며 신륵사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을텐데 ...지금 이자리에 서 있지만 하나도...정말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기억세포가 정말 나이가 들어 갈수록 이토록 안타까워 지는 건가요?

[보물 제 230호 대장각기비] 

수학여행하는 학생처럼 차분히 돌아 봅니다.









다층전탑과 대장각기비를 돌아보고 나면 극락보전으로 가는 돌계단을 내려오면 마주하게 되는  구룡루와 범종각,  김병기 공덕비를 만나게 됩니다.  계단을 내려서자 담장 앞의 커다란 바위위에 쌓아놓은 작은 돌탑들이 인상적입니다.  이제 막 극락보전이 있는 본당으로 향하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아내 입니다.  이제 잠에서 일어나 체크아웃 했다고 합니다.  다시 가서 데리고들 와야지요~~ㅎㅎ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신륵사를 찾았습니다.  조금전까지만 하더라도 매표소가 잠겨 있더니 일찍부터 매표소 직원이 나와 계시더군요. 한마디 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관람료는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핀잔을 주니... 아내와 아이들! 이런 곳엔 당연히 돈을 내야 한다면서 저를 나무라더군요.  그런가...?ㅎㅎ


구룡이 승천한 자리에 세워졌다는 "신륵사"


신라 진평왕 때의 일이다. 원효대사가 지금의 한강 유역에 절을 짓기 위해 절터를 찾고 있었는데  “절을 어디에 지어야, 참된 부처님의 도량으로, 천년을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고심하며 절터를 물색하던 어느 날, 길을 가던 원효대사의 눈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연못이 있었다.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가보니 아홉 마리의 용이 뒤엉켜 연못에서 놀고 있었는데 이윽고 하나둘씩 목욕을 끝내고 하늘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그 신비한 광경을 목격한 원효대사는 용들이 승천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신륵사’로 전해지고 있다.  내용참조-다음검색


아침 해가 비추는 강월헌으로 


큰 딸아이와 엄마는 셀프인증샷에 재미를 붙이고


이리 찍고,


저리 찍고, 난리가 아닙니다.~~^^


귀염둥이 막내 별이와 친구 샛별이도 예쁜 포즈!





 이른 아침이라 딸기농부 가족외에는 관람객이 아무도 없습니다. 토욜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신륵사를 전세 낸듯 기분이 좋습니다.  엄마키를 훌쩍 넘는 아이들이 대견합니다.  가슴으로 안고, 울고 보채는 아이 업어주던  갓난아기 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엄마 키를 훌쩍 넘습니다.  삼십년만에 찾아온 신륵사!  딸기농부의 마음을 아는지 제 가족들에게 고즈넉한 천년고찰의 고풍스러움을 기분좋게 선물합니다.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사진으로 추억속에 차곡차곡 남겨 놓습니다.



바로 이 자리!

삼십년전의 10대의 중학생의 소년이  서 있던 그 자리에 이제는 50을 향해가는 중년의 딸기농부가 

서 있습니다.  그 때와 똑같은 자세로 포즈를 취해 봅니다.  어찌 이리도 빨리 흘렀는지... 인생무상... 화살같이 빠름을 

느끼는 순간 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층전탑은 변함이 티끌하나 없는데... 소년에서 중년으로 세월을 머금은 소년의 마음을 가진

딸기농부가 서 있습니다. 아주 감격의 마음을 가지고! 이제는 혼자가 아닌 가족을 데리고 함께 그 자리에 외롭지 않게 서 있습니다.



보물 제 226호 [다층전탑]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앟다고 해서 전탑이라 부른다. 

화강암을 재료로 2층의 기단과 3층의 계단을 쌓고 그 위에 탑신부 6층을 전탑으로 쌓아 올렸다.


예쁜 딸아이들과  사랑하는 아내가 함께 합니다. 그래서 더 외롭지 않습니다.

다시 또 앞으로 이 자리를 찾게 될 때 몇년의 세월이 흐른 뒤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때도 내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였으면 좋겠습니다. 



다시한번 보는 보물 제 230호 [대장각기비]

고려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위해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이숭인이 지은 비문은 당시 직제학 권주가 쓴 해서체로 탑신에 깨어진 부분이 많아 판독이 어렵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률,론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금의 명부전 자리에 있었다고 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천년의 고찰의 기운이 감도는 경기도유형문화재 128호[극락보전]과 보물 제225호 [다층석탑] 특이한 것은  사찰 대부분의 석탑들이 화강암을 재료로 사용하는데 비해 다층석탑은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국보 제 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재질과 조각양식이 매우 유사하다고 합니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 [1472년] 새롭게 단장을 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때 건축된 것으로 전해진다.


명부전에 보존된 보물 제 1791호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사진에 담아오질 못해 아쉽다. 특히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2012년 12월 27일에 문화재청에서 새롭게 지정된 보물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1610년 제작과 인일[仁日]이라는 조각승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으로  확인되어 조선시대 불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명부전과 조사당 앞에는 무학대사가 그의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심었다는 향나무가 400년의 오랜 세월을 품고 있다.


[조사당]- 보물 제 180호로 지정되었으면 이곳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신 곳이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형태로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금씩 사진 찍는 것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는 아이들~^^*^^


보물 세점이 함께 모여 있는 조사당 뒷편의 소나무 숲으로 108계단을 오르듯 걸어 올라갑니다.

삼십년전의 수학여행 때 왔던 곳이지만 마치 처음 오듯이 모든게 새롭습니다. 


신륵사 뒷편 소나무 숲에 모셔진 나옹화상의 사리탑-[보제존자석종부도] [석등]



보물 제 228호 보제존자 [석종부도]/보물 제 229호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 231호 [석등]

보제존자 나옹은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 이에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사찰내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웠다고 한다.  석종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랫 기단은 연꽃무늬를 넣었고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문은  양 옆에 화강암으로 보호하고  지붕돌은 목조주택의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골을 새겨 넣었다.



삼십년이 넘어 다시 찾아온 여주 천년고찰 신륵사!  10대의 중학생 소년에서 50을 향하는 중년의 나이에 가족들과 돌아보는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둘째, 세째 딸아이가 함께 하지 못해 아쉽지만 이후로 삼십년이 흘렀을 때도 이 자리에 제 가족들과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아마도 그 때는 귀여운 손주 녀석들까지 더 복스러운 가족들이 되어 있겠지요~   보물이 무려 8점이나 보존되고 있어  아이들 역사교육에도 큰 도움이 되었던 여주 신륵사 여행!  삼십년 후의 더 멋진 여행후기를 기대하면서  펜을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