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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서원]에 가면 임진왜란때 왜적을 섬멸하던 망암 변이중 선생의 화차가 있다

푸른희망(이재현) 2014. 5. 11. 06:00


[봉암서원]에 가면 임진왜란때 왜적을 섬멸했던 망암 변이중 선생의 화차가 있다


"군졸들이 총통에 화약을 장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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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서원의 시징당에 제작된 "망암 변이중 선생의 화차"


 2012년 겨울에도 이곳을 다녀 왔었다.  그때는 시징당이 내부공사중이어서 들어가 보질 못해 아쉬움이 컷었는데 이번 방문에 화차를 볼 수 있어 마음이 매우 흥분을 감추지 못했었다.  시징당 안에 제작 전시된 화차가 후손의 말씀으로는 두 대였는데 한 대는 장성 상무대 군부대에서 요청이 있어 그곳으로 보내어졌고,  사진에 보듯이 무섭게 생긴 호랑이 그림이 삼면에 그려져 있고 총통을 발사할 수 있는 구멍이 40개가 뚫어져 있다. 망암 변이중 선생의 [화차도설]을 보면 양쪽으로 이동이 원활하게 수레바퀴가 있었다고 한다.  두 해전 상무대 연병장에서 화차 발사의 시연회가 있었다는데 참관하지 못해 많이 아쉽기만 했다. 그래도 다행이 이번에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물리치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망암 변이중 선생의 화차를 볼 수 있어 감개가 무량하다.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 봉암산 아래 1697년 [숙종 23]에 망암 변이중 선생[1546~1611]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망암 변이중 선생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나 군사전략에도 밝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큰 공을 세운 분이시지요. [총통화전도설]과 [화차도설] 등을 지었으며 직접 화차 300여대를 제작하여 행주대첩의 대승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봉암서원은 노령산맥의 하나인 입암산의 한 줄기가 광덕산과 성미산 구봉산 등을 거쳐 봉암산이 되니 그 모양이 봉명조양[鳳鳴朝陽 봉황새가 동쪽에서 운다는 뜻으로 천하가 태평할 조짐을 일컬음]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좌우로 큰 마을이 있어 장안[長安]이고 왼쪽에 동화산은 청룡을 이루고 오른쪽에 옥녀산은 백호를 이뤄 여러 산의 물이 동서로 안고 흘러 봉암서원의 앞에서 합쳐지니 그것이 바로 황룡강으로 만난다 합니다. 서원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사당이 뒤에 모셔져 있고 교육을 하는 강당이 앞에 위치해 있답니다.  [내용참조 봉암서원 안내문]


봉암서원과 시징당 전경


[삼강정려]


봉암서원 입구의 왼쪽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삼강정려" 입니다.  올해는 봄에 들렸더니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불두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네요삼강정려엔 망암 변이중 선생의 종제인 휴암 변윤중 선생과 부인 함풍성씨, 그리고 며느리 이천서씨의 삼강을 기리기 위한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시징당 안의 내부 모습 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기전차와  뒤쪽으로 망암 변이중 선생의 화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화차 안이 궁금하시죠?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쉿~! 지금은 장전중..

지금 화포를 담당했던 군사들이 총통에 화약을 넣고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에게 무시무시한 살상무기 였다고 하는 화차 입니다. 


화차 안의 40발이 장착된 총통입니다. 

금방이라도 왜적을 향해 불을 뿜을 듯 기세가 당당합니다.

나라를 빼앗기는 설움과 치욕은 다시는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고직사]


봉암서원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기거하며 생활을 했다는 고직사 앞의  만발한 철쭉꽃 사이를 호랑나비 한마리가 

쉴새없이 춤을 춘다. 아마도 봄이면 찾아오는 우국충정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나비의 넋으로 이곳을 찾는가 보다.


봉암서원의 첫 관문인 "두남문"





두남문을 지나면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성경당"


모란꽃이 활짝 핀 봄날의 봉암서원은 또 다른 운치가 가득하다.  

봉암서원의 성경당에서 미래의 동량들이 수학하던 낭랑한 글읽는 소리가 마치 들리는 듯 하구나.

모란의 향에, 자태에 어찌 젊은 청춘들이 엉덩이가 들썩거리지 않았겠는가? 얄밉도다 모란이여~!






성경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서원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훈덕재와  경의재가 보인다. 보통은 동재와 서재로 분류하며 전4칸측1칸의 맞배지붕 구조이다.  내삼문에 새겨진 현판엔 "엄온문" 글귀는 추담 김우급의 망암선생에 대한 만시 "바라보면 엄하시나  가까이 대하면 따뜻하셨도다" 라고 한 뜻에서 취한 것이라 합니다.  서원의 중심부인 이곳에는 철쭉, 목련, 모란등의 봄꽃들이 만개하여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기쁨을 전해 준다.  가운데 저 바위는 몇 백년을 저 곳에서 요동도 없는가 보다.  바위에게 물어 보고 싶은 심정 가득하다. 바위에게 눈과 귀가 있다면 아마도 파노라마처럼 이곳에서의 일들이 구구절절 기록되어 있으리라!



망암 변이중 선생의 높은 학문과 덕행를 기리기 위해 세운 봉암서원! 화차를 제작하던 유적지로서  1981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 54호로 지정 되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추모제를 한다고 합니다.  전국 여러 곳의 목사, 군수등을 거쳐  61세에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하곡 정운룡, 추담 김우급 선생등 벗들과 경전토론 및 진원현과 장성현의 합병에 따른 민심수습책으로 향헌 20조를 만들어 고향 민심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합니다.  봉암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령이 내려져 이를 모면하지 못했지만 1975년  장성군의 유림과 후손들이 복원을 발의하고 198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전라도 곳곳의 유구한 역사문화사적지를 돌아보면서 마음속에 벅찬 감격들이 밀려옴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남녀노소 불문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