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우리들의 이야기

5년간의 짧고도 긴 이야기, 이제 푸른희망의 예쁜 싹을 튀었답니다.

푸른희망(이재현) 2011. 12. 16. 06:00

 

 귀농한 첫해 단감을 재배하면서 농사의 감을 잡고,  이듬해 부터 예쁘고 맛난 딸기를 재배하면서 농사의 맛을 알아가고 있는

다섯살 초보농군의 귀농 이야기, 한번 들어 보시렵니까?

 

한 해 한 해 지나는 여름날의 왕성한 농작물들을 되돌아 봅니다.

 

마치 눈사람을 모양을 한 무를 캐면서  간간이 농사에서 느끼는 재미와 자연의 신비함도 누리기도 했습니다.

고추도 제법 많이 달렸었었고,  살랑이는 바람에도 부러질 듯 가녀린 모습이더니 조금씩 청년고추로, 새색시 고추로 화려한   변신을 했었지요, 바로 옆 두룩에 파종한 미니 찰 옥수수가 메마른 표면을 힘차게 가르며 솟구쳐 그 푸르름을 더 했지요. 정말이지 매년 보는 광경이지만 신비하기만 한 자연의 변화 였습니다.  막내 푸른별이가 고사리 손으로 일손을 거들면서 생명의 신비에 신기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었답니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농촌을 찾았지만 자연스럽게 귀농이 되어 버린지 벌써 5년을 넘고 있습니다. 작은 체구의 아내와 코흘리개 아이들 넷을 거느리고 찾아 온 마당 한 가득 잡초와 집안 구석구석 거미줄이 넘쳐나고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아득하게 세상 꺼져가는 한숨이 지는 땅거미와 함께 너무도 무겁기만 했습니다. 마당 가득 어지러운 지난 삶의 부스러기들이 체념한 듯 맥들이 빠져 제멋대로 였지요. 마루 끝자락에 걸터 앉은 아이들의 모습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인생 팔, 구십을 다 살아온 노인네 마냥 쓸쓸해 보였었지요.

 

2003년 5월 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던중 우연하게 (지금 생각하면 마치 필연같은) 아내의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장성 진원의 빈집으로 월세 5만원에 이사를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바리바리 이사짐을 싸들고 온 빈털터리 우리들의 앞에 펼쳐진 현실은 정말 가혹하리 만큼 냉혹했습니다. 현실앞에 이대로 무릎을 꿇을것이냐 새로운 희망을 살리느냐의 중대귀로 였습니다. 그러나 자포자기 같았던 광주생활과는 전혀 다른 삶의 자세들이 마술과도 같이 우리가족의 내면의 열정을 불사르기 시작했습니다. 도배며, 장판이며, 생활에 필요한 것들부터 팔을 걷어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했지요. 이것은 절대 진리임을 진정으로 깨닫는 시기였습니다. 아이들도 3Km가 넘는 시골학교를 도보 통학으로 굳은 소리 없이 잘 해주었습니다. 조그만 시골의 소학교, 큰아이가 6학년 6월에 전학을 했으니 불과 7개월을 다니고 달랑 7명의 졸업생이 전부인 졸업식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뭉클해집니다. 1년여가 지날 때 쯤 마을의 이장님께서 아래 마을의 구판장(작은 시골구멍가게)을 해보라면서 제안이 들어와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마을 부녀회에서 새롭게 꾸민 가게로 이사를 하는 날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집안에 설치된 좌변식 화장실을 너무도 반겼습니다. 또한 학교 가는 길도 조금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300평정도의 감나무(대봉)밭을 임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골 구판장의 수입은 생쥐 꼬리만큼이나 되었으나 처음으로 농지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하고 면사무소에 내 이름의 농지원부를 발급할 때의 기분은 조금 들뜬 기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해 늦은 가을, 짙은 주황빛의 큼직한 감을 수확해서 방안 가득히 펼쳐놓고 선별하여 제 이름이 당당히 새겨진 종이박스에 담겨질 때는 가슴이 벅찼습니다. 뜨거운 여름날, 제초작업이며, 병충해 방제 약제 살포의 힘든 수고가 보람으로 다가왔습니다. 고사리 손으로 일손을 도왔던 아이들의 눈에서 생기가 돌았습니다. 이제는 조금씩 귀여운 촌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내내 머리 감싸며 선별작업을 마치고 프라이드의 뒷칸에 실어 광주 공판장에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출하를 했습니다. 몸은 힘들지만 처음으로 내 이름을 적고 수탁증을 받아 올 때는 정말 흐뭇했습니다. 초보농군의 시작은 비록 보잘 것 없고 명함도 못 내밀었지만 농심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 간이식을 하고 1년여는 몸을 추스르는 시기였습니다.

 

 

 

 

이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내가 법원에 제출한 파산신고가 거의 1년을 넘어 면책까지 결정되어 통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정말 또 한고비를 무사히 넘었습니다. 채무의 칠흙같던 압박에서 조금씩 벗어 났으니까요. 2007년 2월, 드디어 많은 고민과 생각을 집중하던 감나무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너무나도 너른 8000평의 새로운 보금자리 였습니다. 새 임대인과 2년간의 농지 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적어도 농지 임대차는 5년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데 집주인의 완강함으로 그러지를 못했지요. 하지만 주변의 우려가 많았습니다. 몸도 성하지 않은 놈이 어떻게 그 넓은 평수를 관리하겠느냐고... 정말 농사라는 본격적인 괘도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000여주의 감나무가 심어져 있는 너른 땅이 어마어마하게 넓었습니다. 풍성했던 잎들이 모두 떨어진 과수원은 정말로 썰렁한 겨울 바람만이 불었습니다. 아직 체력이 많이 회복되지 않은 터라 겁도 났습니다.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몇 년간 사람이 손을 대지 않은 밭이라 기가막힐 정도로 나무마다 가시덤불이 타고 올라 그상태로 말라붙어 흰눈이 쌓이니 정말 거대한 솜사탕 같았습니다. 아내와 함께 쇠시랑(쇠스랑)으로 제거작업에 며칠을 소비했습니다. 병충해의 온상인 나무 껍질도 주걱같이 생긴 연장으로 일일이 긁어 내었습니다. 정말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먼지가 콧구멍, 목구멍을 막기가 일쑤였지요. 간이식 수술과 더불어 찾아온 귀농의 출발이 부담이 가는 것은 정말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막막할 시점 목포대 원예학과를 졸업한 친구에게 감나무의 정지전정을 부탁하는 전화를 했을 때 “친구야 요즘은 예전의 농촌지도소가 농업기술센터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기술지도를 신청하면 출장외근을 나오니 전화를 해 봐!” 라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그렇게 센터와의 인연의 고리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정을 자세히 얘기하고 약속을 잡았습니다.

 

며칠 후 농장에 두서너 대의 자동차가 진입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센터의 모든 직원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고맙기만 했습니다. 전정가위와 톱을 모두 들고 정말로 열심히 작업을 해주었습니다. 과수담당 이셨던 최영상 계장님께서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기술적 방법을 시원하게 가르쳐 주셨지요.

 

 

 

 

 여기서 첫 번째로 말씀드릴 것이 “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입니다. 농업에 관한 기술적인 모든 사항에 대하여 바이블 같은 기관입니다. 농업의 기술과 행정에 대한 전반적인 궁금증과 어려움은 대부분이 해결될 수 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농업인들의 회관도 센터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주 들르시어 농업인과의 친목도 그렇고 직원들과의 유대강화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기술지도를 받고 난후 본격적으로 전정업자들 고용의 비용 발생 없이 스스로 700여주의 전정작업을 2개월여가 걸려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했던 것 같습니다. 노동력을 투입해 짧게 끝내고 효율적임을 말입니다. 최저의 비용은 불가결함을 느꼈지요, 그래도 농장을 돌아 보는 그 순간은 정말로 보람이 마음속 가득했습니다. 마을 형님의 소개로 병충해 방제용으로 중고 경운기도 저렴한 가격에 구입을 했습니다. 농장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경운기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 때가 지금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납니다. 늘 조언과 격려를 해주시는 마을 이장님에게 작동법을 배웠습니다. 경운기를 서툴게 운전하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조금씩 농부라는 명찰이 어울리게 붙어갑니다. 너른 과원을 제초관리할 중고 제초기계도 구매했습니다. 필수적인 몇몇 장비는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지난 8월에 농기계임대센터가 기술센터내에 설립이 되어서 고가의 농기계를 구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여름에 제초작업과 병충해 방제 작업을 할 때는 너무나도 힘이 들어 후회도 몇 번이고 해보지만 땀을 식히며 감나무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마음을 다시 다독이고 했습니다. 베어내고 또 베어 내도 생장점이 제거되지 않는 한 마침내 살아 남아 씨앗을 퍼뜨리는 잡초를 보면서 용기를 얻습니다.

 

 

 

 

 

 두번째로 말씀드립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필요한 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가면 목표점에 다다를 것입니다. 여기서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면 다시는 일어설 용기가 나질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 힘듬이라는 체험적 경험은 내 인생의 올바른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하나의 방법들이 모여 해가 바뀌어 가면 훌륭한 농법이 됩니다.

 

과원의 빈 땅에는 감자, 고구마, 콩, 배추, 고추, 깨 등도 심어 자급자족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농작물들이 모두가 심어야 할 때와 거두어 들일 때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자연 교육이 되고, 그러한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정서적으로도 건강한 아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제 아이들의 소중한 시골과 농사의 경험은 요즘 아이들이 얻지 못할 가치 있는 추억이 되어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의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지혜가 될 것입니다. 어미개가 강아지를 낳고, 닭들이 알을 낳아 수탉과 함께 지낼 때 유정란이 되어 병아리를 깐다는 것을 알고 직접 키우고 예뻐하면서 생명의 귀중함을 배워갑니다. 참으로 돈주고도 못할 인생의 참 지혜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소설속의 얘기가 아닙니다. 충분히 준비를 꼼꼼히 하시고, 자연에 순응하며 때가 있음을 깨닫게 되면 정말 자연스럽게 저의 이야기가 “아하 그렇구나! ” 라고 느끼실 것입니다. 요즈음은 시골 초등학교의 시설도 결코 도시 못지않게 구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이곳은 인근 지역의 도시 부모들이 일부러 전학을 보내어 공부를 시키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는 처음부터 귀농의 경우는 아니어도 이렇게 정착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수 많은 정보와 다년간의 알뜰한 준비들을 하시었기에 그리 많은 시행착오는 없이 잘 되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세 번째로 농업과 관련된 교육은 되도록 수강을 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농사기술과 근본이론이 무장될 때 그 힘은 배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08년 3월부터 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미래농업대학 감 학과를 수강했습니다. 단기 1년과정 월 2회의 짧은 기간이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하는 교육이라 농업경영에 큰 지식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09년 올해는 2회차로 딸기와 토마토의 2개학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1회차 졸업생이기에 정식 입학은 힘들지만 청강생으로 딸기과목을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11월부터는 담양,장성 딸기 광역클러스터에서 운영하는 프로농업인 교육도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많으면 이리도 한가하리만큼 교육받는데 정성을 다하는가 라고 의문이 가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만들기 나름입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유기농 기능사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학습의 기회도 부여해 주셔서 우리 부부는 농사에 필요한 자격증도 갖추었지요.

 

 

한가지 한가지 선진기술이 쌓여갈 때 그 파워는 엄청나리라고 생각합니다. 쉼 없이 도끼질 하는 나무군 보다는 쉬어가며 날카롭게 도끼날을 가는 나무군이 결국 생산성이 높듯이 말입니다. 변화하는 글로벌 경제의 패러다임을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생산자인 농민본인이 기업의 대표자로 인식하고 경영인의 정신으로 임해야 합니다. 차곡히 쌓이는 알찬 자료와 정보는 정신적인 밑거름과도 같습니다. 가급적이면 아내와 함께 받으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농업을 하다 보면 아내의 역할이 소중함을 몇 번이고 깨닫습니다. 교육과정에 포함된 선진지 견학을 통해서 보다 나은 실질적 노하우를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론적 바탕과 많은 체험적 노하우들이 융합될 때 조금씩 농업에 탄력을 받게 됩니다.

 

 

 

 

2007년 10월 저는 주변 지인의 권유로 농장 내에 있는 낡고 허름한 하우스 2동을 손수 보수하고 비닐을 쒸워서 겨울에 소득 작물로 딸기를 선택했습니다. 토지경작으로 두둑을 만들어 재배하는 과정은 단감과는 또 틀린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딸기 작목반에도 가입을 했습니다. 농업을 경영하다 보면 단체의 조직된 경쟁력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농협의 조합원 가입이 그렇고, 본인의 판단에 의해 영농법인이 그렇고, 일반적인 해당작물 작목반 가입이 그렇습니다.

 

 

 

 

네째로 바로 인적, 조직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라 고 말씀드립니다. 지자체의 대부분의 보조사업들이 단체를 통하여 지원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배적 어려움에 직면할 때 여러 선배님들의 조언은 금쪽같은 처방서가 되기도 합니다. 시설하우스 재배에 딸기로 첫발을 내딛으면서 하우스의 기반시설작업들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09는 금년에는 고설 딸기 양액재배 사업을 받아서 6월부터 9월초까지 5년간의 토지 임대부터 직접 로터리 작업과 평탄작업등을 하여 하우스를 짓고 양액 배관 및 베드 설치작업을 아내와 아이들의 자발적 도움과 지원으로 9월 17일 딸기 모종을 무사히 정식(아주심기)하여 아마도 12월 중순이면 수확에 들어 갑니다.

 

 

 

 

 

수술후 매월 1회의 정기적 진료와 헤파빅이라는 항체주사를 맏고 매일 면역억제제를 복용하지만 정말 조금씩 조금씩 농사일을 진행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놀랄 때가 많습니다. 병원에서는 바이러스 감염우려가 있으므로 흙을 다루는 일과 밀폐된 곳에서의 작업을 만류하지만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고 작업후의 청결관리만 철저히 하니 현재까지 합병이나 부작용 없이 지냅니다. 인터넷에 간이식들의 훌륭한 정보공간인 “리버가이드”라는 카페가 있습니다.저는 이곳에서 동병상련의 아픔과 많은 정보들을 얻습니다. 긍정의 생각과 즐거운 농작업은 힘든 농사일을 무난히 해 낼 수 있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이제 5년차의 아직도 초보 농군이지만 착실하게 농업의 지혜를 배워갑니다. 농업은 6차 산업이라고 합니다. 1차 생산, 2차 가공, 3차 판매 이것들이 모두 더해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창의적 사고가 가미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도매시장 의존의 판매형태는 결코 높은 소득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이제는 인터넷이라고 하는 공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개인 블로그도 운영하면서 (소위 블로그 마케팅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농사이모저모를 스토리텔링 하듯 엮어 나가면 자연스럽게 방문자가 많아 집니다.

 

다섯번째로 사이버농업에 관심을 가져라 (인터넷을 활용하라)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08년 6월 처음으로 나주에서 개최되는 한국사이버 농업인 전진대회를 농업기술센터의 권유로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행사장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전국 각지의 농업인들이 생산한 각종 농산물들이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에서는 연발 감탄사가 튀어 나왔습니다.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브랜드네임을 홍보하는 것도 대기업상품 못지 않았고 디자인과 상품포장들이 정말 농민들이 만들어낸 것일까 할 정도로 눈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습니다. 참석한 많은 농민들은 2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했습니다.

 

6~70대의 그분들은 정말 존경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농업의 흐름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게 하고 어떻게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지 각성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변화하는 패러다임을 정확히 알 때 1억이상 농부의 말들이 거짓이 아님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성공사례를 발표하는 사람의 우여곡절 농사경험도 눈물납니다. 그런 과정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들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이 컴퓨터 전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해당 지역센터, 도 기술원에서 운영하는 각종 정보화 교육을 들으면서 전자상거래와 농업을 접목시킨 성과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 열정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농업과 교육은 필히 동반되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농사를 짓다보면 타성에 젖어 과거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대충 어떻게 되겠지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보조사업에 과욕을 부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떠한 것을 이루어 내는 데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씩 한 걸음 한 걸음 가십시오. 농업은 절대로 욕심을 부린다고 되질 않습니다. 이미 결정된 방향에 대해서 스텝 바이 스텝으로 나아가십시오. 농업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미래입니다. 사람들에게 먹거리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단단한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들에게서도 그렇고, 토양의 양분을 흡수하여 알알이 영근 벼에서도 행복한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장밋빛 환상이 아니라 차곡차곡 준비된 여러분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라 봅니다. 우연에서 필연으로 인생전환을 하고 있는 저와는 차원이 다르지요. 세계경제의 흐름 또한 생명 농업에서 찾을 수 있음을 느낍니다.

 

아직까지 많은 소득을 올리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생명산업인 농업을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준비하여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시작은 비록 작지만 산을 오르면 정상이 보이듯, 그 정상이 보이는 순간 그 희열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도 그랬듯이 지금 이 순간은 안개속에서 길을 찾는 것과도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저의 금지옥엽같은 코흘리개 아이들도 많이 성장을 했습니다. 제게는 딸이 넷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 초,중,고,대학생으로 자랐습니다. 이 모두 자연이 키워준 보람들입니다. 붉은 단풍들로 가득했던 과원도 엄동설한을 준비하려 잎들을 모두 떨구고 고즈넉합니다. 한 여름의 땀과 수고가 집약된 하우스에는 앞 다투어 딸기가 익어 갑니다. 이 모두 농민이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열심히 농업에서 푸른희망을 가꾸는 꿈을 착실히 키워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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